피카디리 앞에서 2시까지 만나

90년대로 접속

은서 : "삐삐도 없을 땐 어떻게 만났어?"


문득 궁금했다. 부모님은 어떻게 데이트를 했을까. 은서가 엄마 은숙과 아빠 현영에게 물었다.


은숙: "미리 약속을 하는 거지. 몇 월 며칠, 어디서 보자고."

은서: "늦으면?"

현영: "다방 메모판에 적어두는 거야. 나 왔다 간다, 라고. 아니면 단성사나 피카디리 앞에서 보자고 하고 계속 기다리는 거지."


우리는 5분만 연락이 안 돼도 불안하다. 세상은 효율적인데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이상하다. 빨라질수록 기다릴 줄 모르게 됐다는 게.



케빈: "우리 부모님도 피카디리 근처 다방에서 첫 데이트 하셨대"


나는 1993년부터 종로3가에 있는 교회를 다녔다. 덕분에 지금은 많이 바뀐 단성사와 피카디리 리모델링 전을 기억한다. 극장하면 단성사와 피키디리였던 시절이 있었다. 이곳을 걷는 건 내 시간표를 뒤적이는 일이기도 하다. 90년대생인 우리에겐 찍먹하듯 지나온 아날로그의 파편들이 발에 차인다. 완전히 살지도, 완전히 떠나보내지도 못한 시간들.


단성사와 피카디리가 한눈에 보이는 종로3가 2-1번 출구에서 출발해 세운상가로 향했다.


세운상가엔 먼지 쌓인 캠코더들이 즐비하다. 충전기를 잃어버려 켜지지 않는 내 집 안의 기계들이 생각났다. 새것은 쏟아지는데 우리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케빈: "요즘 웨딩 영상도 저런 걸로 찍잖아. 레트로한 게 매력있어."





아쉽게도 부모님들이 데이트했던 다방들은 없어진지 오래다. 그래서 우리는 그나마 비슷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세운상가에 있는 다방, 세운나 다방에서 쌍화차를 마셨다. 노른자가 동동 떴다. 70년대부터 있었다는 곳이다.


부모님들처럼 성냥을 쌓아보고, 쌍화차를 한 모금 마신다. 벽에 걸린 낡은 메모판을 보며 생각했다. 누군가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여기 앉아 있었을 거라고. 담배 연기 자욱한 실내에서, 식어가는 차를 홀짝이며 성냥을 쌓았겠지. 지금이라면 문자 한 통이면 될 일을. 그때 사람들은 기다림의 무게를 알았을 것이다.



적당히 추억을 즐긴 듯해서 자리를 옮겼다. 역시 우리는 현대식 카페가 편하다.




"와 미쳤다. 빨리 마셔봐."


벌새. 은서가 가자고 한 카페. 사실 커피 맛이 좋다는 카페를 여러 군데 가봤지만 크게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벌새에서 마신 커피는 달랐다. 마시자마자 눈이 커졌다.


내가 이렇게 눈이 큰 사람이었나. 실눈같은 눈이 커지자 은서가 놀랐다.


"오빠 눈이 되게 컸구나?"


2025년을 통틀어 1등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마신 커피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맛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쇼츠나 미디어를 보는 대신 책을 읽었다. 나와 은서는 달과 6펜스 사이에서 방황중이다. 설혹, 책 속에서 조금의 힌트를 발견할까? 하는 마음에 <달과 6펜스>를 읽는다.




CD를 '굽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음악을 소장했다. 지금은 음악을 '가진다'는 의미가 옅다. 음악을 너무 손쉽게 접할 수 있으니까. 소장하고 싶은 무게감은 없다. MP3 메모리를 채우려고 고민하던 그 밤의 순서들. 어떤 노래를 먼저 넣을까, 어떤 노래는 빼야 할까. 그때는 선택이 신중했다. 용량이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편리함은 낭만을 갉아먹는다. 동시에 선택의 무게도 앗아간다.




종로 한 바퀴를 돌고 나니 90년대에서 2026년으로 훌쩍 넘어온 기분이다.


사서 고생하는 일. 불편을 감수하는 낭만. 우리는 그걸 찾아 세운상가를 걸었다. 부모님 세대가 당연하게 살았던 시간의 밀도를, 기다림의 무게를, 선택의 신중함을.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건 아날로그 그 자체가 아니라,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일지도 모른다고. 5분을 기다리지 못하는 우리가 한 시간을 기다렸던 그들의 마음을 흉내 내보는 것. 그게 레트로가 주는 위안일지도.


세운상가의 먼지들이 묻어왔다. 털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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