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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석 May 17. 2017

'인간'에 대한 믿음

<언노운 걸>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2017

조그마한 클리닉의 의사인 제니 드방(아델 하에넬)은 어느 날 울린 초인종을 진료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무시하기로 한다. 제니는 다음날 클리닉에 찾아온 경찰들을 통해 그 문 뒤에 있던 사람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이 소녀의 죽음 이후 제니는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클리닉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제니 드방은 이 소녀의 이름을 찾고 싶다.     


<언노운 걸>에 대한 많은 글들은 영화가 인간에 대한 감독(다르덴 형제)의 믿음을 드러낸다고 했고 누군가는 영화가 살아남은 사람의 죄책감을 너무 안일하게 해소한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의 생각은, 아니 인상은 저 중 어느 하나도 아니었다. 영화관을 나오며 머릿속에 맴돌던 것은 제니 드방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특히 남성들)과 마주했을 때마다 반복되었던 일련의 장면들이었다. 이름이 없는 소녀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제니 드방은 마치 탐정처럼 관련 인물들을 찾아 탐문수사에 나서는데 이 과정에서 그녀는 일련의 남성들과 마주한다. 그들을 똑바로 직시하며 그녀가 진실을 요구할 때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행동을 한다. 그들은 큰 소리를 내고 손을 올려 위협함과 동시에 자신의 몸집을 크게 보이게 한다. 위협을 느낀 동물이 보이는 행동이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즉각적인 긴장감과 전개에 대한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일련의 ‘비겁한 위협’들은 현실 속 수많은 닮은꼴의 인간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인간의 추악함에 대해 다시 상기시켜주었다.     

그런 장면들이 주는 기분 나쁨은 머릿속에 생각만큼 오래 자리 잡고 있진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일상에 지쳐 무기력함을 느끼던 순간에 문득 생각지도 않았던 영화 속 이미지가 찾아왔다. 영화 직후 맴돌던 장면들과 연관되지만 배치되는, 그 비겁한 위협의 반대편에 있던 제니 드방의 모습. 그들을 마주하는 그 단호한 표정.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단어 조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문제’를 마주하는 제니 드방의  단호한 얼굴이 떠오른 후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단어는 ‘제니 드방과 같은 인물에 대한 믿음’으로 바뀐다. 소녀의 이름을 찾으려는 일련의 노력. 제니 드방의 탐문수사는 그녀가 피해자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죄책감에서 출발하지만 그녀는 그 과정에서 그녀의 물리적 세계 및 내면적 세계를 변화시킨다. 의사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중(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고 싶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죽었을 때 모두가 그녀의 잘못이 결코 아니라고 말해주기 급한 곳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행동하는 제니의 행동. 결국 소녀의 이름을 찾아주고 연관된 인물들의 안온한 일상에 중요한 파장을 만들어낸 것은 이런 그녀의 변화한 태도이자 행동이다.      


인터넷은 나를 매일 차마 형용할 수도 없는 슬프고 화나는 일들만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한다. 그러한 세상을 마주하고, 욕을 하고, 무기력함을 느끼고, 회의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상에 큰 부분이 되어버린다. 무수히 많은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내 삶을 불안하게 하는 일련의 개인적이며 일상적인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나는 그것들과 마주하며 물리적 인간으로서의 한계 속에 선택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내 삶을 영위하는 것도 힘든 일상에서 그런 일들을 생각하고 신경 쓰고 어떤 노력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그 와중에 문득 찾아온 제니 드방의 단호한 얼굴은, 그녀의 행동들과 변화한 일상들은, 수많은 끔찍한 사건들이 매일 벌어지는 세상 속에서 그것을 마주하며 단호하게 행동하는 많은 인간들과 그들의 삶을 분명히 기억하게 만든다. <언노운 걸>은 너무나도 잊기 쉬운 인간의 모습, 믿고 싶은 인간의 모습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그러니까 <언노운 걸>은 수많은 쓰레기로 가득한 세상에, 그 세상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기 주변의 쓰레기 하나하나를 주어 가는 사람들,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는 영화이다.     

<언노운 걸> 직전 다르덴 형제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기억은, 무기력한 자신의 몸을 이끌고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밖으로 나서는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의 복잡 미묘한 움직임이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들의 사정을 마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정을 들이미는 과정. 내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산드라는 이 과정으로 현재의 내일을 위한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산드라는 결국 ‘성공’ 하지 못한다. <내일은 위한 시간>은 영화 결과적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해준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주인공을 내세우며 인간애로의 승리에 따른 미소를 지으려고 하지만 영화 속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하지만 그런 구조를 체화한, 노동을 관리하는 자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에 의해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는 인물들의 사고를 뒤흔드는 수단은 결국 인간적인 접촉이지 않느냐고 제시하는 듯하다. 다른 몸속 동일한 세계에 대한 교집합을 가지는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로. 결국 중요해지는 것은 인간의 행동, 자신이 체화한 세계와 부딪치고 다른 세계에 파장을 일으키는 충돌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태도이다.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힘에 매달려 나아갈 뿐인 인간에게 과거의 사건에 대한 완전한 해소는 존재해서도 안 되고 존재할 수 도 없다. 나는 <언노운 걸>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제니 드방의 일련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름이 없던 소녀의 이름을 찾아줌으로써 그녀의 죄책감을 해소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절대로 이 사건 이전의 그녀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무기력하게 현재에 묶인 지금의 인간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지금부터 이어지는 내일의 삶이다.      

<언노운 걸>, <내일을 위한 시간>의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화면 속에 남겨진 인물은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바꾸어나간 인물이다. 그리고 고로 다른 이들의 세계에 파동을 일으킨 이들이다. 나에게 기여할 믿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이들에게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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