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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광펜 Sep 24. 2022

외신기자에서 삼성전자, 아마존까지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왕따 (2)

아버지 직업 따라 서울로 이사 오게 된 우리는 본격적으로 한국 아파트 생활을 개시한다. 다시 우리 가족만 살 집이 생겼다는 게 너무 좋았고, 내 방이 생겼다는 점에 더더욱 기뻤다. 그 방에선 부모님이 미국에서 선물해준 시디플레이어 겸 라디오는 하루 종일 켜져 있었고, 시험 기간엔 빠짐없이 故신해철의 고스트 스테이션을 끝까지 듣곤 했다 (그 새벽까지 공부만 했던 건 아니고 딴짓도 물론 했다). 서울에서는 어른들처럼 지하철 타고 등하교도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맞이한 학교 분위기는 내가 그동안 경험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안양에서 여학교를 다녔지만, 서울 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시험 결과에 따른 희비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도 흔한 일. 가령 중간고사 기간 중 과목 하나하나 끝날 때마다 드라마틱하게 탄성을 내며 울거나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학생도 있었으며, 집요하게 다른 교우들의 성적을 물어봐 전교 학생 순위를 매기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으로 전학 온 나에게 반 아이들은 영어 관련된 것 외엔 큰 관심이 없었고, 되려 그걸 싫어하고 견제했다. 심지어 전학 온 첫 주에 '일진' 학생 여럿이 나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니가 미국에서 살다왔다며? 깝치고 다니지 마라." 딱히 뭘 한 게 없어도 이유 없이, 존재만으로 난 그들에게 공격 대상이었다. 안 그래도 내성적인 성격인데 더더욱 달팽이가 껍질 속 몸을 숨기듯이 나는 여기서도 나를 드러내지 않는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학생들이 나를 자주 괴롭힌 건 아나지만, 불량학생뿐만 아니라 몇몇 다른 아이들도 졸업 때까지 나를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시기했다. 


이때 생긴 트라우마로 인해 나는 중학교 시절에 대해 생각하거나 누군가에게 자세히 말하는 게 아직 힘들다. 이 글도 계속 썼다 멈췄다 반복하는데, 이 시리즈는 나의 커리어 관련 노력의 과정을 서술하는 게 목적이니 세세한 피해 이야기나 특정 인물 언급은 생략하겠다.




학교에서 이렇다 할 스트레스 해소 창구나 흥미가 크게 없었던 나는 집에서 만큼은 내가 미국에서 형성하게 된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우울함 속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나는 해외 음악이나 책을 꾸준히 접했고, 그 와중에 인터넷에서 영어 경시대회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000년도에 열린 제11회 서울 중고등학생 외국어학력 경시대회 영어부문. 큰 기대를 하고 참가했던 건 아니고 내 실력이 궁금해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렸다. 내가 아직 가치 있는 사람인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꽤 길었던 리스닝, 독해 시험 후 회화 부분에서는 질문을 듣고 학생마다 앞에 놓인 흰색 카세트 플레이어에 스스로 녹음 버튼을 꾹 꾹 눌러가며 육성을 녹음해야 했다. 긴장해서 차가워진 손을 부여잡으며 "I'm very nervous right now"를 답안 하나에 덧붙인 기억이 난다. 


그 절박한 감정이 통했는지 혹은 점수를 깎았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거머쥔 은상은 나에게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되었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차차 세워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이사 및 전학을 다녀야 했던 나에게 앞날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감사한 일이었다.


다른 경시대회도 나가 입상하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학생들을 계속 마주치게 됐는데, 이 친구들 통해 외국어고등학교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왠지 그곳에서는 내가 튀지 않고 무난하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외고를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외고를 내신 성적만으로 가기엔 불안했던 나는 각종 외고에서 주최하는 경시대회 입상자에게 주는 특례입학 유형을 목표로 삼았다. 골대가 눈앞에 선명해져 엄마를 이끌고 영어 문제집을 사러 책방에 가고, 영어로 일기와 다른 글도 꾸준히 쓰고, 발음이 녹슬까 책을 목소리 내어 크게 읽는 연습도 계속했다. 나는 경시대회서 비슷한 실력을 가진 해외 거주자 전형으로 시험을 봤기에 입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노력 끝에 대일외국어고등학교 경시대회 금상 수상자로 원했던 외고 입학에 성공. 소정의 장학금도 제공되어 가족의 등록금 부담도 조금 덜게 되었다. 


나의 지긋지긋했던 중학교 시절에도 끝이란 게 있었고, 나는 정상적인 학교 생활에 대한 기대를 안고 정릉 언덕 꼭대기서 감색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 입학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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