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 2022
누구나 ‘%’와 그래프에 익숙하다. 행동의 근거로 삼을 때도 내 주장에 힘을 실을 때도 가장 편하고 강한 수단이다. <다음 소희> 속 수치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숫자와 그래프가 가득한 칠판을 보면 빽빽함에 숨을 쉴 수 없다. 수치 뒤에는 사람이 있다.
<다음 소희>는 신기한 구조로 진행된다. 1부와 2부로 나뉘어 1부에서는 소희가 일련의 사건을 겪는다. 2부에서는 1부의 사건을 형사 유진이 조사하며 실은 관객에게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들려준다. 그러나 시점은 다르다. 1부는 수치 뒷면의 사람인 소희의 시점을 그대로 따라간다.
소희는 학교의 추천으로 콜센터에 현장실습을 나간다. 그곳에서 해지 방어율, 실적, 인센티브 등 수치로 평가받는다. 1부는 소희로 대표되는 수치로 평가받는 사람들 심지어 임금이 달라지는 사람의 이야기를 개인의 시점으로 보여준다. 소희는 생존자였다. 가혹한 시스템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시스템이 비정상적이란 걸 알았을 때도 생존법을 찾아내 이용한다. 그런 소희가 무너진 건 인격을 무너뜨렸을 때다.
2부에서 유진은 소희를 평가한 그 수치를 다루는 ‘수치 앞면의 사람(들)’을 조사한다. 만날 때마다 그들은 자신도 수치로 평가받는 ‘수치 뒷면의 사람’이라고 호소한다. 관객은 분노하지만 공허하다. '그래서 제일 나쁜 사람이 누구지? 결국 시스템의 문제란 건가?'
영화가 끝난 후 화도 나고 답답했지만 일단 부끄러웠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부끄러워한다. 유진이 콜센터와 본사의 직원을 차례로 쳐다볼 때 누구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선생님도 그렇다. 교육청 직원도 자리에 앉지 못한다. 그 정도와 진정성은 다르지만, 소희의 이야기 앞에서 누구나 부끄럽다.
영화는 유진을 필두로 용감무쌍하게 진실을 파헤치며 오로지 책임을 묻기 위한 여정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나 유진이 없어진 우리는 소희의 이야기를 계속 안고 갈 수밖에 없다. 특히나 유진의 여정의 끝은 우리를 작게 만든다.
“그래서 뭐 다음은 교육부로 가시게요?”
어떤 조직이든 역할이 정해져 있다. 직장이 효율적으로 굴러가기 위해 위계를 합의한다. 그건 역할의 위계다. 그 역할이 결코 인격의 위계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랑 님의 <늑대가 나타났다>에는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요’라는 가사가 있다. 빵을 만들고 와인을 만드는 역할을 수행할 뿐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라 호소한다.
<다음 소희>는 소희가 일하는 콜센터 상담원뿐 아닌 주변의 모든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주차장 안내원, 제조업 종사자, 먹방 스트리머 심지어 아이돌. 안 힘든 일이야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비교적 인격이 안전하지 못한 역할이 있다. 시스템이 정상적이라면 그 속의 인격 또한 안전해야 한다. 만약 시스템이 비정상이라면 더더욱 인격이 안전해야 한다.
소희가 열고 유진이 닫는 듯 보이는 이 영화는 사실 소희의 춤으로 시작해 춤으로 끝난다. 그 모든 일을 보여주고도 소희의 인격으로 맺는다. 비정상적인 시스템에서 시스템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는 못할망정 이준호 팀장처럼 인격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런 인격 보호자가 다치지 않게 도와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소희가 무너진 건 새로운 팀장의 ‘인신공격’이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강철의 연금술사>에는 ‘아랫사람이 더 아랫사람을 지키는 세상’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이라는 말이 어색하지만, 역할로 바꾸면 조금 더 다가온다. 하지만 <다음 소희>는 그런 세상을 보여주지 않고 끝난다. 성공사례를 제시하지 않는다. 성공적인 시스템을 제시하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을 그 시스템을 기다리는 데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개인으로서 다음 ‘소희’가 나오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을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수치 뒤엔 인격이 있다는 걸 깨닫는 데에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희의 이야기를 ‘그런 사건’으로 덮지 않는 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