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과 책임의 비대칭이 만든 리얼리즘의 균열
구병모의 소설이 독자에게 남기는 잔상은 언제나 서늘한 현실 감각이었다. 『파과』에서 은퇴를 앞둔 킬러 '조각'과, 『위저드 베이커리』의 마법사 점장이 감내해야 하는 삶의 무게를 기억한다. 그들은 비현실적인 능력을 갖췄음에도 결코 현실의 중력 밖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능력 때문에 남들보다 더 깊이 베이고, 더 처절하게 고생하며 삶의 절창(切創)을 온몸으로 증명해냈다. 독자들이 그들의 삶에 공감했던 이유는 화려한 액션이나 마법 때문이 아니라, 인과의 칼날에 베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정직한 고통에 있었다.
그러나 신작 『절창』에 이르러 작가가 보여준 리얼리즘은 어딘가 흔들린다. 이 소설의 제목은 살이 베인 상처(切創)를 의미한다. 소설 중반부까지는 이 상처의 감각이 팽팽하게 작동한다. 아가씨의 기이한 능력을 빌려 뒷골목을 점령해 나가는 오언의 기세는 지독할 정도로 세속적이고 리얼하다.
아가씨와 기타선생의 탈출극은 실패하고 기타 선생은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오언이 아가씨에 대해 전혀 제재하지 않는다는 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오언은 권력의 정점에서, 아가씨를 인질로 잡은 독서선생의 통제 아래 운전대를 잡고, 그 상황을 끝내기 위해 일부러 사고를 낸다. 여기까지는 작가가 전작에서 보여준 '능력자가 치러야 할 대가'라는 문법이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진짜 문제는 그 '절창'이 오언에게만 국한된다는 점이다. 오언은 아가씨의 능력을 휘두른 대리인이자 실행자였을 뿐이다. 아가씨의 초능력이 없었다면 오언의 폭력 조직 점령도, 그로 인한 비극도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사는 오언에게만 혹독한 대가를 묻고, 아가씨에게는 비교적 안전한 퇴로를 허락한다. 현실의 법과 정의라면 당연히 공모자인 아가씨를 끝까지 추적하여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 지점에서 리얼리즘의 잣대를 거두어들인다. 이미 공권력과 폭력 조직에 정체가 노출된 아가씨가 아무런 방해 없이 평온한 '섬'에 정착하는 결말은, 서사적 개연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할 책임의 논리를 스스로 무너뜨린 듯 하다.
누군가는 아가씨가 오언의 '도구'였을 뿐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약하다. 압도적인 초능력을 보유한 존재는 결코 피동적인 도구로 남을 수 없다. 그 거대한 힘을 휘두르는 순간, 그녀는 힘이 미치는 방향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권력의 주체가 된다.
능력을 부여하되 책임은 묻지 않는 세계는 소설이라기보다 안전한 판타지에 가깝다. 만약 그녀가 정말 힘없는 도구였다면, 그 무력함 자체가 서사 속에서 더 가혹하게 증명되어야 한다.
결국 『절창』에서 수갑은 한 짝만 채워진 셈이다. 오언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 한 짝이 차가운 현실을 대변할 때, 나머지 한 짝의 주인공인 아가씨는 마치 작가가 마련한 비상구를 통해 빠져나간 듯하다.
전능한 힘을 가진 존재일수록 그 선택의 무게는 더 무거워야 한다. 『나 혼자만 레벨업』에서 전능한 성진우조차 남겨진 네 병의 생명의 신수 앞에서 고뇌하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았던가.
오언의 몸에 새겨진 째진 상처(절창)가 아가씨에게는 한 방울의 피로도 전해지지 않은 이 결말 앞에서, 나는 리얼리즘의 균열을 본다. 책임 없는 힘은 서사를 빈약하게 만든다.
'조각'이 견뎌낸 그 고통스러운 세월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절창』의 아가씨가 보여준 안식처는 너무나 가볍고 공허하다. 문학은 도망친 자리보다, 상처를 부여잡고 버티는 자리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