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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Nov 12. 2021

전역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한 5월의 어느 날.

무더위는 아니었지만 연병장에는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연병장에서 열 맞춰 서있는 포대 용사들과 간부들을 보며 많은 감정이 들었다. 길었던 것 같지만 덧없이 짧은 시간들. 

단상에 있는 마이크 앞으로 다가가 땡볕 밑에 서있는 그들을 바로 보니 준비해왔던 길고 긴 이임사를 읊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단상에 있는 마이크에 첫 운을 떼었을 때 이임사는 단상 아래 그대로 있었다. 


"A포대 여러분, 그동안 함께해서, 함께여서 즐거웠습니다."


이 짧은 이임사를 끝으로 포대 지휘권을 넘겼다. 후회도 많고 아쉬움도 많았지만 그래도 함께여서 즐거웠다는 정말 하고 싶은 말만 남긴 채 이취임식이 끝났다. 짧은 이임사에 같이 했던 인접 포대장들은 전역자는 클래스가 다르다며 박수를 쳤고 대대장님께서는 이임사를 준비 안 했냐며 오해를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대대 간부들과 간부회의실에서 다과회를 하며 인사를 나누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재임 기간 동안 한 부대에서 부대끼면서 가족보다 많은 시간들을 함께 했고 같이 고생했던 간부들과 이제는 이별을 해야 하니 웃는 얼굴이지만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이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내가 있을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니 서글프기도 했다. 그렇게 포대장 1년 9개월 포함 5년 4개월의 군생활을 끝마쳤다. 



요즘 같은 취업난 시대에 군인만큼 좋은 직업이 어딨냐며 주위에선 만류했지만, 군대에 남아있기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군인이 하기 싫은 건 아니었다. 군인도 좋은 직업이고 가치 있는 일이며 이 안에서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군 생활을 지속할수록 점점 더 하고 싶은 일에 대한 확신이 뚜렷해졌다. 군인은 국가를 위해 희생이 필요했고 그 많은 사람을 짊어지고 간다는 책임감은 무거웠다. 군인이라는 직업을 하기에는 나라는 개인이 너무 중요했다. 



많고 많은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가 글쓰기였다. 잠 못 드는 밤 쓰고 싶은 글들이 떠올라도 다음날 출근 때문에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잦은 야근으로 글 쓸 시간조차 나지 않기도 했다. 때론 훈련 때문에 흐름이 끊겨 한동안 쉬는 일도 생겼다. 그런 제약 없이 마음껏 글을 쓰고 싶었다.  

많은 장르의 글들을 쓰고 싶었지만 그중 하나가 내 군생활에 대한 기록이다. 

처음 포대장 직책을 받고 배치됐을 때 내 나이는 겨우 27살이었다. 부족한 것도 많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보통 남자들이라면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에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우리나라 남자라면 대부분이 군대를 갔다 오기에 군대 관련 콘텐츠들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병사로 전역을 하다 보니 대부분의 콘텐츠들이 병사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군대였다.  

포대장이라는 역할을 하면서 병사들이나 초급간부들보다 군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면서 겪었고 이런 상황에서 같은 사건이라도 생각하는 바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쓰고 싶었다. 또한 군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직업군인들의 세계를 알기 쉽게 말하고 싶었다.  


물론 글솜씨가 부족하여 중간중간 오해를 사기도 하고 군생활의 오점 같은 것도 드러내다 보니 욕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어서 독자들이 직업군인들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올라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ps.

아직 풀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아있지만 요즘은 글이 꼬이기도 하고 다른 일들에 치여 예전처럼 연재를 하지도 못하고 있기에 이제는 글을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 못한 많은 이야기들은 만약 기회가 된다면 다른 콘텐츠의  통해 풀어내 볼 예정입니다. 


읽어주신 독자분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추후 더 좋은 글로 찾아오겠습니다. 




1개월의 전직 교육반을 마치고 전역 신고하는 날.

그래도 나름 괜찮은 군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전역 신고를 앞두고 생각지도 못한 비보에 그동안 얼마나 착각 속에 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부대원 중 한 명이 암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그 부대원은 일병이었지만 그래도 몇 개월 동안 함께했던 친구였다. 

암은 이미 상당히 진행되어 말기에 가까웠으며 사실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너무 젊은 나이라 그 누구도 암이 있을 것이라곤 예상 못했다. 

이 정도면 입대 전에 이미 시작된 상황이었으며 암의 특성상 큰 증상이 없어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것은 군대의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마음은 그러지 않았다.


당직을 서면서 몇 번 그 친구가 한밤 중에 고열이 난다는 보고를 받았다. 

처음엔 단순 감기 비슷한 증상이라 생각했다. 야간에는 당직 체계로 돌아가기 때문에 사단 의무대로 당직 차량으로 후송을 해야 하는데 막상 가면 고열 정도로는 자세한 검사를 받기도 어려워 조치받을 수 있는 사항이 많지 않다. 그렇게 사단 의무대에 가서 해열제 정도만 처방받아서 왔고 다음날 열이 내려서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 후 당직을 설 때 또 그 친구가 고열이 난다는 보고를 받았고 다음 날 열은 좀 있는데 괜찮다고 하길래 몸이 좀 약한 정도로만 생각했다. 

결국 그 친구는 쓰러져서 중환자실로 가고 나서야 정밀 검사를 받게 되었다. 포대장을 이임하고 나서 부대를 떠나 있어서 전역을 하러 간 당일에서야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후 그 친구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갔을 때 차마 그 친구의 부모님 얼굴을 뵐 낯이 없었다. 


만약 그때 단순 감기 정도로 치부할게 아니라 좀 더 관심을 갖고 정밀 진단을 받게 했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친구의 얼마 없는 시간을 군대라는 곳에서 허비하는 게 아닌 가족 곁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포대장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바란 것이 아니다. 

그저 젊은 청춘들이 의무라는 이름으로 군대에 와서 뭐 하나라도 얻어서 무사히 전역시키는 것만이 목표였다. 하지만 결국 나와 함께 했던 친구 중 한 명은 무사히 전역을 못 했다. 

그래서 군생활을 돌아보면 아직 마음 한편에는 무거운 납덩이로 남아있다.


그 친구가 떠난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 편히 쉬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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