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포병 장교가 되다

뭐? 견인포라고?

by 쿠바노스

(이미지는 구글 제미나이로 생성했습니다. 또한 군사 보안사항에 해당하는 교육의 자세한 내용은 전혀 다루지 않았음을 미리 밝힙니다)


내가 육군포병학교에 입교했던 시점에는 코로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따라서 입교하자마자 바로 격리에 들어갔다.

심지어 식당에 밥도 먹으러 갈 수가 없어서 격리 기간동안 한솥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

군대의 특성을 고려하면 지금 생각해봐도 말도 안되는 일인데,

단톡방에서 개인별로 메뉴 투표를 받아서 선택한 메뉴를 끼니마다 교관들이 문 앞까지 배달해주었다.

(메뉴 투표를 받은 건 우리를 고려해서라기 보다 강제로 메뉴를 지정해서 먹게할 경우 강매가 되어 법적 문제가 생길까봐 그랬던 것 같긴하다)

후술하겠지만 나는 그 뒤로도 격리를 2번 더 하게 되는데, 포병학교에서의 격리기간 동안 내내 (누적 한 달) 한솥 도시락만 먹어서 완전히 질려버렸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한솥 도시락을 사먹지 않는다.

특히 한솥 특유의 달달한 무말랭이 맛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을 정도다.


격리기간이 끝나고 ‘학급’이 편성되고 본격적인 포술학 교육이 시작되었다.

4인 1실이었던 생활관에는 나포함 학군 출신 3명과 3사출신 1명이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또 지금 생각해봐도 놀라운 점은 생활관 벽면에 무려 스탈린의 명언이 붙어있었다는 점이다.

‘포병은 현대전의 신이다’

물론 전투에서 포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립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반공 정서가 지배적인 군대 안에서 스탈린의 말을 보게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무튼 교육 내용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임관 전까지 받았던 군사 교육은 아무래도 가장 수가 많고 역사도 오래된 보병의 교리를 토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포병에 대해서는 나 뿐만 아니라 사관학교 출신 동기들도 완전히 ‘노베이스’였다.

포술학의 과목들은 포가 발사되기 까지의 과정에 필요한 역할들을 중심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 과목들과 함께 모든 병과들의 공통 과목이라 할 수 있는

통신법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아무래도 실물 포를 움직이며 방열과 사격절차를 연습하는 ‘전포’과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견인포가 뭔지 알게되었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자주포 실습을 위해 흩어졌는데, 나와 몇 명의 동기들만 견인포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건 내가 가게될 부대가 견인포를 운용하는 부대여서였다.

2차대전, 한국전쟁에서 썼을 법한 투박하고 육중한 견인포가 내 앞에 놓여있었다.

자주포를 다루는 동기들이 버튼 딸깍 눌러 편각과 사각을 맞출때 우리는 힘으로 돌려야 했다.

지금 교육은 그렇다 쳐도 야전에 가서 어떨지가 막막하게 느껴졌다.

열악한 장비가 있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군 생활이 평탄하지 않으리라는 복선과도 같았다.


한참 교육을 받던 와중, 포병학교 내에서 코로나 감염자가 속출하는 시즌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밀접 접촉자로 격리를 했다가, 결국 음성 판정으로 풀려났지만

두 번째 격리에서는 양성이 나와버렸다.

이틀차까지는 아무 증상이 없었는데, 3일차부터 목이 매우 아프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로 아팠냐면 ‘내가 목에 화상을 입었나?’하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증상 발현 전날 밤에 컵라면을 먹었는데, 라면 국물에 식도가 데였나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가

그랬다면 애초에 밤부터 아팠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코로나 증상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당시 포병학교는 아프면 알아서 의무실에 가야했지만, 코로나 격리자들은 (당연히) 직접 갈 수 없기 때문에 담임 교관에게 증상을 말하면

교관이 대신 약을 받아 갖다주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나도 교관에게 증상을 보고하고 약을 요청했다.

교관은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어떻게 된 일 인지 이틀이 지나도 약을 갖다주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도 않았다.

목이 아파서 밥이랑 물은 물론 침 삼키기도 힘들 지경인데 아무 소식도 없으니 정말 화가 많이 났다.

내가 살면서 누구를 그렇게 욕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도 포병학교 교관으로 배치되었다는 건 군에서 우수하다고 인정받았다는 뜻일텐데

제자이자 후배, 그리고 ‘전우’를 고통 속에 방치해두는 그 무책임함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짧게 군생활 하지만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당시 근처에 아는 분이 근무하고 계셔서 그 분을 통해서 약을 전달 받을 수 있었고, 마침내 고통에서 벗어났다.


차라리 5월에 감염되었더라면 kctc훈련이라도 빠질 수 있었을테지만,

나는 훈련 복이 너무 많았다.

kctc훈련은 가장 실전적인 훈련으로, 대항군 역할을 하는 부대인 ‘전갈부대’와 모의 전투를 하는 방식이었다.

일주일 간은 밖에서 텐트를 치고 먹고 자며 훈련 준비를 하고, 그 다음 일주일 간은 무박으로 전투를 했다.

물론 잠을 못자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지독한 강원도 추위에 고생했다.

당시는 5월이었음에도 밤이되면 기온이 영하 5도까지 내려갔기 때문이다.

은박 담요도 덮어봤지만 이미 체온이 떨어져있어서 그런 지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


3개월의 교육을 모두 마치고, 이제서야 정말 출발선 앞에 섰다.

하지만 사실 불안했다.

‘내가 아는게 뭐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어디든 가면 적응을 잘하는 것이 내 강점이기 때문에 그냥 나를 믿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펼쳐질 운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