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 중위는 이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지는 구글 Gemini로 제작하였습니다. 또한 개인의 일화이니 이 글만으로 일반화의 오류는 범하지 마시길…)
부대 전입 및 사단에서의 교육을 마치고, 수색중대 파견 전까지 약 한 달간 원 소속 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계급장만 달았지 완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갓 태어난 소위, 그게 바로 나였다.
본래 야생에서 가장 취약한 동물, 맹수들의 먹잇감이 되는 동물이 어떤 동물인 지 아는가?
바로 초식동물의 새끼들이다.
아무리 초식동물이라 해도 성체를 사냥하는 것은 아무리 맹수라해도 쉽지 않다.
하지만 새끼동물들은 야생이 얼마나 험한지 모르고, 느리고, 순진하기 때문에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한편, 나에게는 벌써부터 시련이 닥쳤다.
9월달 부터는 파견을 가야하는데, 9월달 당직 근무표에도 내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직근무표 작성을 맡고 있는 본부 소속 부사관 (상사)에게 파견을 가는데 당직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문의했다.
그는 “알아서 근무 협조를 보시던지 해야됩니다”라고 답변했다.
나는 그런 줄로만 알고 다른 근무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8월 근무와 내 9월 근무를 교환했고,
파견 일정을 맞추기 위해 3일 연속 퐁당 근무를 섰다.
(퐁당 근무란 하루 당직, 다음날 근무취침, 또 다음날 당직 이런 식으로 연속 당직을 서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파견 근무 전날 까지 당직을 서야 했고, 수색 중대에 양해를 구하고 하루 늦게 파견을 시작했다.
이때까지 나는 몰랐다.
파견 간부는 파견 2주 전부터 파견 종료시까지 당직 근무에서 제외시킨다는 부대 규정이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당직 근무표 작성을 담당했던 부사관은 물론 내가 근무 협조를 위해 만났던 어느 누구도 그런 규정이 있음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진짜 분노가 치밀었다.
그들 입장에서 나는 얼마나 손쉬운 먹잇감이었겠는가?
안그래도 근무 서기 싫은데 알아서 나타나서 자기 근무를 한 번씩 더 해주는 “쏘위”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킬빌’을 보면 영화 시작 시 이런 문구가 하나 나온다.
“ Revenge is a dish best served cold.”
‘복수는 차갑게 식혀야 제 맛‘이라는 뜻이다.
복수는 절대 감정적으로 하면 안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소위 시절 나는, 비록 군 생활을 오래할 뜻이 없었음에도 뭐든지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자세로 임하고
부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파견 전 당직 사건을 겪으며 모두에게 그렇게 해봤자 바보가 될 뿐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억울하지만 소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미 서버린 근무를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부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권력관계는 어떤지 등을 파악하고 이용할
여유와 경험자체가 없기 때문에 비록 계급은 나보다 낮더라도 짬은 찰 대로 찬 상사에게 당장 맞설 수는 없었다.
이렇게 순진했던 소위는 2년 간의 억까를 견뎌내며 결국 ‘말년 중위’로 성장하였다.
말년 중위란 어떤 존재인가?
군 생활에 뜻은 없고, 전역할 날이 머지 않은 존재, 그래서 눈치볼 필요가 없는 존재,
그러면서도 부대 돌아가는 사정과 부대 내의 권력관계를 죄다 파악하고 있는 존재이다.
후술할테지만 나는 말년 중위라고 해서 전혀 뺀질거리지 않았고,
이기적인 동기와 후배를 대신해서 전역 한 달 전까지 GP파견을 대신 다녀올 정도로,
그래서 대대장님이 나에게 매번 미안해할 정도로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했다.
아무튼 그런 말년 중위의 상태에서 타 부대 훈련을 지원하기 위해 내가 파견을 가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제 규정을 잘 알고 있는 나는 바로 근무표 담당 부사관에게 전화를 걸어 파견 시작 2주 전부터 근무를 제외해달라고 요청했고,
근무표에서 제외되었다.
일부러 복수하려한 건 아니었지만, 복수의 기회는 ‘알아서’ 찾아왔다.
훈련 일정이 계속 조금씩 밀리더니, 아예 훈련 자체가 취소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GP 파견을 위한 수색중대 파견까지는 한 달이 남아있어, 원래대로라면 2주간은 다시 근무에 들어가야했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당직 근무의 관리 책임자는 인사과장이지만, 그 위가 작전과장님이다. 그런데 작전과장님은 나를 좋아할 뿐 아니라,
내가 부족한 동기와 후임 몫까지 대신 해주는 것에 대해 미안해한다.
그렇다면 과장님한테 잘 얘기할 경우 2주간 공짜로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원래의 보고 계통을 따지면 인사과장에게 가는게 맞다.
그러나 당시 인사과장은 1년 선배인데다가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라 이런 요청을 들어줄리 없었다.
따라서 나는 점심시간에 식사 후 식판을 씻고 계시는 작전과장님 옆에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과장님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어 그래 **야. 요즘은 뭐 별일 없지?
“근데 그 훈련이 취소가 됐다고 들었는데, 제가 한 달 뒤면 또 파견을 가야해서… 당직근무가 좀 애매해진 상황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에이! 그냥 들어가지 말고 가만히 있어 ㅋㅋ”
예상보다 더 쉽게 작전과장님은 내 손을 들어주었다.
부대 서열 2인자이자 작전계통 책임자의 지지를 얻은 나에게 두려울 건 없었다.
내가 계속 근무에 안들어가자, 주변 간부들도 낌새를 눈치 채기 시작했다.
한 부사관은 “관측장교님 요즘 당직 서시는 걸 본 적이 없는거 같습니다?”
라고 말했고,
나는 “에이 기분 탓입니다 기분 탓!” 이라고 말하며 씩 웃었다.
그때, 소위 때 나를 물먹였던 근무표 담당 부사관을 마주쳤다.
“관측장교님, 그 훈련 취소됐다고 들었는데, 이제 근무 들어가셔야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거 참 저도 근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작전과장님이 바로 다음에 파견도 있고 하니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지 뭡니까?
저도 참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하며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