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 입학한 지 벌써 한 달...

나는 부스케츠 같은 조장이고 싶다

by 쿠바노스

1.

나는 축구를 좋아하는데, 역대 축구선수 중 최애를 단 한 명만 뽑으라면

그건 바로 '세르히오 부스케츠'다.

위대한 감독 펩 과르디올라가 극강의 바르셀로나를 이끌던 시절,

포지션을 배치할 때 언제나 가장 먼저 넣고 생각했다는 선수,

간결한 드래그백으로 압박을 벗겨내고 번뜩이는 패스를 찔러넣는

'세 얼간이' 중원의 출발점.

그게 바로 부스케츠였다.

세 얼간이 중 나머지 두 명인 이니에스타나 차비처럼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주지는 않아서

부스케츠를 좋아하는 사람을 나는 별로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부스케츠가 없었다면 바르셀로나는 황금기를 맞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선수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후방 플레이메이커들이다.

스스로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지만, 경기장 전체를 관망하면서 팀 전술 구현의 중심축이 되는 포지션.

없으면 팀이 안돌아가는 포지션.

그게 바로 후방 플레이메이커형 수비형 미드필더다.


2.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맡겨진 사소한 일이라도 책임져서 해내려고 했었다.

비록 장교로 가긴 했지만 단기복무라서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던 군대에서도

타 부대 병사들이 나를 육사 출신인걸로 착각할 만큼 내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공적인 책임을 지는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그 점에서는 확실히 자신감이 있다.

그래서 아무래도 법조계 진로도 공직으로 잡게될 가능성이 높다.


3.

내가 다니는 로스쿨은 신입생 OT에서 조를 짜주었다.

한 조에 11명인데, 내가 조장을 맡게 됐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원자를 받을 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장교 출신들은 공감할 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순간을 좀 못참는다.

누군가는 해야하는 데 아무도 나서지 않는 순간을 말이다.

'별로 할 거 없다'는 선배의 꼬심도 한 몫 했다.

사실 다 학부를 마치고 온 어느정도 인생 짬이 쌓인 사람들이 모이는 로스쿨이라는 집단에서

조장이라는 작디 작은 자리에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매일 꾸준히 공부를 하면서도 어떻게 조의 분위기를 만들어가야할 지 고민해왔다.


4.

장교로서 당직설 때는 100명 넘는 사람들을 이끌어본 경험도 있으니

겨우 조장정도야 쉽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처음에 했었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내가 말하면 무조건 듣는 100명을 관리하는 것과

모두 각기 수평적인 관계의 10명을 조정해나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거기에 나는 원래 내향적인 성격이라서 분위기를 확 주도하고

적극적으로 단합할 활동 같은 것들을 추진하는 것을 잘 못한다.

그래서 솔직히 어제 까지 스트레스를 좀 받았다.

'내가 좀더 적극적으로 밥먹자, 술먹자하는 말도 좀 하고 술자리에서 재미있게 해줘야했나?'

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어떤 조는 공강 때 한강 공원에 놀러갔다더라 하는 얘기도 들었기 때문에

그런 조의 조장과 나를 비교하기도 했다.

나는 한 명 한 명한테 세심하게 다가가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반영하고

판을 열어주는 것은 잘 하지만 내 스스로가 화려하게 재미있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나랑 친해진 사람들은 '잔잔하게 웃기다'라고 나를 표현한다.

가끔 한 마디씩 재치있게 던지는 말이 재미있다는 거다.

그러나 주로는 들어주는 걸 더 잘하는 편이다.

어제는 처음으로 조끼리 모여 새벽까지 술을 마셨는데 거기서 신나게 이야기하면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분위기를 주도할 것을 요구한 사람은 없었으나,

스스로 그런 책임감을 느꼈고, 성격상 그게 잘 안돼서 마음이 불편했었다.


5.

그런데 오늘 같은 조의 동기랑 밥을 같이 먹다가

단합이 잘 안되는 다른 조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면서 내가 "우리 조는 그래도 사람들이 좋아서 다행이야" 라고 했더니

"조장이 잘해줘서 우리 조가 잘 돌아가는거지"라고 그 동기가 말했다.

예의상 하는 말일 지라도 그 말이 참 고마웠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히 봤던 박지성 선수의 영상을 떠올리게 됐다.

영상에서 박지성 선수는 자신이 맨유에 처음갔을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 했다.

"퍼거슨 감독이 나를 왜 영입했는지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호날두처럼 플레이 할 수 없다.

그러면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플레이를 경기장에서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맨유 같은 강팀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해야했다"

라는 내용이었다.

동기의 말과 그 영상이 겹쳐지면서 확 깨달음이 왔다.

나도 내가 잘할 수 있는걸 하면 된다.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고 분위기를 주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그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면 되는거다.

그들은 메시, 이니에스타, 차비고 나는 부스케츠가 되면 되는거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물론 그런 역할이 잘 되는 것도 조원인 동기들이 나를 배려해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다시금 동기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6.

물론 로스쿨에서 0순위는 공부이고 그 사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3년간 늘 마주칠 사람들과 즐겁게 잘 지내는 것도 공부 바로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플레이 '스타일'이 부스케츠 같다고 해서 모두가 부스케츠처럼 잘할 수 있는건 아니다.

그래도 부스케츠 같은 조장이 되고 싶다.

그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스케츠다'를 되뇌이며, 다시 민법 공부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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