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과 네 잎의 클로버

자식의 전 생애를 대하는 부모의 인내로

by 유하






“외롭진 않으셨어요? 타워 크레인 위에서요.

저도 올라가 봤거든요.

많이 외롭고, 춥고, 무섭더라고요.”


자식의 전 생애를 대하는 부모의 인내로



- 유하ㅁ리,

『사월의 꿈 i - 5. 달의 노래』 중






아무도 없는 듯하지만 그 무엇이라도 있을 것 같은 가운데 유일하게 사부작거리는 자신의 발소리는 사월을 바짝 긴장하도록 만들었다. 기어이 되찾고야 만 소중한 영혼의 구슬을 목에 걸려 있는 한결의 모래시계 안에 넣을까 생각도 해 보았으나 행여 다른 모래알들과 섞여 버리지는 않을까,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그는 두 손으로 그것을 단단히 움켜쥐며 걸었다. 다행인 점은 모래시계가 사슬 목걸이로 사월을 단단히 잡아끌며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 눈앞의 시계가 뿜어내는 인도의 빛, 사월은 모든 의식을 그곳에 집중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비집고 나오는 의구심. ‘내 손에 쥐고 있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확실해?’ 이 소리의 출처가 내부인지 외부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진 사월이 주변을 돌아보던 차에 아, 내면의 상태를 즉각 현실로 만드는 비인간의 날래고도 야속한 힘이여! 그는 돌부리 같은 것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무기력해진 두 손은 땅을 짚었고, 그 사이 영혼의 구슬은 어둠 속으로 튕겨 나갔다.

‘깨졌는지도 몰라.’ 구슬이 깨지면 안의 영혼도 사라질지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으로 사색이 된 사월의 시야에 불길한 안개가 모여들었다. 머릿속에서 불행을 쫓아내려 할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지더니 미라 같은 형체를 만들어 냈다. 자세히 보니 희뿌연 형체는 몸에 휘감긴 붕대를 푸는 중이었다. 얼굴이 보이고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 붕대를 푼 당신은… 그렇지, 동희 아버지! 안도감도 잠시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월은 스스로의 교수형을 집행하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아저씨를 위험에 빠뜨렸어요. 죄송해요.”

반면, 바닥을 기는 사월의 감정과 자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동희 아버지의 따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 이렇게 와 주었잖니.”

사월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저만치 앞서 가는 중이었다.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사월은 다시 또 그를 잃을까 얼른 발걸음을 뗐다.



[ 유하의 플레이리스트

Debussy - Clair de lune ]



동희 아버지와 나란히 서기 위해 사월은 꽤나 먼 거리를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영혼에게 회귀본능이 있는 것인지 사월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열렬히 방향을 알려 주던 모래시계도 잠잠했다. 사월은 그의 씩씩한 발자취가 풀숲 사이로 만들어 내는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이따금씩 물컹한 진흙 위에 새겨진 동희 아버지의 두터운 맨발자국 위에 사월의 발이 들어설 때면 몸이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신고 있던 운동화에 진흙이 덜 묻는다는 점이 이로웠다. 그러나 사월은 곧 자신도 동희 아버지처럼 맨발로 진흙을 밟고 싶은, 또한 그의 발자국 위에 자신의 자그마한 발자국을 덧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신을 벗어 한쪽 손에 들고 사월은 넓어진 보폭에 맞춰 큼직한 발자국들 위를 껑충 뛰어다녔다.

그렇게 발자국 때문에 멀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내달리며 가까워졌다 발목까지 진흙 범벅이 된 채 겨우 동희 아버지를 따라잡았다. 잠깐 숨을 고르고 사월은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영혼에도 주름이 있다는 것을 사월은 그때 알게 되었다. 오래도록 지혜를 쌓아 온 나무의 단단한 껍질 같은 주름이.

여러 고민 끝에 사월은 질문 하나를 꺼냈다. “외롭진 않으셨어요? 타워 크레인 위에서요.” 그리고 자신의 목에 걸린 한결의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당시의 기억을 되살렸다. “저도 올라가 봤거든요. 많이 외롭고, 춥고, 무섭더라고요.”

그런 말을 듣자마자 동희 아버지는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는 타워 크레인 위로 어떻게 올라가게 됐는지를 물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당혹감을 거둔 그는 자세한 내막을 묻는 대신 이렇게 답했다.

“우리 동희의 꿈을 지켜 줄 수 있다면야….”

그동안 가슴을 무지근하게 짓누르던 죄책과 우려를 잔뜩 끌어 담아 사월은 호소했다.

“다시는 타워 크레인 위로 올라가지 마세요. 너무 위험해요! 동희는 꿈보다 아버지를 더 소중하게 생각해요.”

그러자 동희 아버지가 단호하고 근엄하게 말했다.

“나는 내 꿈이 더 중요해.” 그리고 이내 퍼지는 잔잔한 미소를 막지 못하고 부드럽게 덧붙였다. “동희가 내 꿈이거든.”

모래시계를 손가락으로 훑고 있던 사월은 공포의 모래알이 용기의 모래알을 힘껏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혹은 그 반대였는지도 몰랐다. 문득 사월은 정말로 궁금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듯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오는 걸까요? 아저씨의 아버지도 분명 이렇게나 믿음직스러운 분이셨겠죠?”

다소 껄끄러운 주제였는지 동희 아버지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건 잘 모르겠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를 좋아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다시금 죄송스러운 마음이 올라오자 사월은 저벅이는 발끝만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멋대로 무례한 주제를 던졌으니 어떻게든 만회해야 했다. 잠시 후 사월은 조용히 입을 뗐다.

“그랬다면, 아저씨의 아버지는 스스로가 수치스러울 정도로 아들이 자랑스러웠나 봐요.”

발언을 마친 사월은 상황을 무마하려는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정말 그랬을 거라고 믿게 되었다. 분명 사월의 말을 들은 것 같았는데, 그에 대한 말을 덧붙이는 대신 동희 아버지가 급작스레 외쳤다.

“오, 이럴수가!” 수풀 앞에 멈춰 선 그는 무릎을 구부려 자세를 낮추었다. “네 잎의 클로버를 발견하다니!”

‘보통 네 잎 클로버라고 하지 않나요?’라는 질문이 사월에게 떠올랐으나 곧바로 조금은 엉뚱한 표현에 대한 웃음이 그것을 막아 섰다. 동희 아버지는 일어서며 “이야, 살다 보니 이 귀한 걸 이렇게 쉽게 발견하네.”라고 감탄했다. 그는 네 잎의 클로버 줄기를 검지와 엄지 사이에 잡고 하늘 높이 치켜 올렸다.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돌아가는 네 잎을 두고 그는 마치 푸르른 하늘을 나는 새를 처음 본 아이처럼 기뻐했다.

네 잎의 클로버를 한참 들여다 보던 동희 아버지는 비어 있는 왼쪽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사월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듯 흔들었다. 긴가민가하는 사월이 답답했는지 동희 아버지는 운동화를 들고 있지 않은 사월의 왼손을 힘주어 꼭 잡고 그 위에 자신의 오른손에 있던 네 잎의 클로버를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가장 맑은 곳에 간직해 주지 않으련?”

그곳이 어딜까 생각하며 사월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동희 아버지는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룻배의 작은 정박지에 가까워졌다. 그 광경을 사월이 발견한 순간에 그는 이미 알아서 척척 배에 올라타는 듯하더니 돌연 바다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사월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이렇게 외쳤다.

“아버지!”

동희 아버지의 영혼은 돌아보거나 대답하는 대신 위로 손을 뻗어 보였다. 그리고는 오로지 앞만을 향하며 힘차게 나아갔다.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죽음을 추월하는 비인간조차 헤아릴 수 없었다. 동희 아버지의 세찬 기개로 그가 뛰어든 험악한 바다는 사그라들며 다소곳한 강물이 되어 갔다.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붕대가 돌돌 풀리며 그를 따라가다가 기력을 다했는지 뒤쳐졌다. 신기하게도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의 영혼이 발산하는 빛은 점차 크게 번지며 강물 전체를 비추었다.

분명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확신에 찬 힘찬 몸짓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상황을 무마하려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는 것을 사월은 믿게 되었다. 형체의 그림자처럼 흐물거리다가 이제는 물 아래로 가라앉기에 이른 붕대와는 달리 재빠른 영혼의 속력을 어서 따라잡길 바라며, 그에 비하면 한없이 사사로운 읊조림을 강물에 흘려보냈다. “감사해요.”

커다란 원형의 빛이 되어 가던 그가 지평선까지 다다랐을 때 하늘에 반사된 휘황한 보름달이 보였다. 맞닿은 두 쌍의 달이 8자를 그리고 있었다. 비인간은 목을 왼쪽으로 꺾어, 움찔. 찰칵! 8을 ∞로 만들었다. 참으로 간만에 보는 달이었다. 고맙게도 여기 망자의 섬에서는 얄미운 흰 여인이 부재하기 때문에 이렇게 달이 보이는 것이리라. 이렇게나 아름다운 달빛을 모조리 흰 여인에게 빼앗겨야 했던 한을 쏟아 내며 사월은 그리웠다고, 너무도 그리웠다고 달을 담고 닮은 눈빛으로 전하고 또 전했다. 무례하고도 이기적인 흰 여인과는 달리 자비로운 달은 자식의 전 생애를 대하는 부모의 인내로 사월의 투정 어린 애정을 고요히 받아 내었다.










아빠, 당나귀를 탄 예수님*을 따라가!

아빠를 진정으로 위한 길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것.


2025.3.25.




* 현재 아빠는 인생의 전환점을 걷고 있다. 여러 고민과 갈등, 새로운 길에 대한 선택 사이에서 아빠는 '당나귀를 탄 예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예수가 중심을 잡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말을 잘 듣지 않는 당나귀를 탔다는 이야기였다. 이후 아빠는 출장 중에 공항에서 당나귀가 그려진 컵을 발견했고 이 특별한 우연을 기념으로 컵을 샀다. 아빠는 컵 안에도 당나귀가 그려져 있어 이 컵으로 커피를 마실 때마다 '당나귀를 탄 예수'를 기억한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칼 융(Carl Jung)이 제시한 '자기(The Self)'의 상징과 '동시성(Synchronicity)' 현상으로 해석했다.





1 '당나귀를 탄 예수'를 기념하는 컵

2 먹으면 입안이 다 파랗게 물드는 '우주최강아빠데이' 생일 케이크

3 아빠가 보내 준, 올봄의 첫 꽃송이




4 오래전 함께 산책 중에 선물로 받은 '네 잎의 클로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