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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꽃피 Apr 14. 2022

'이야기'를 이야기

요 며칠 글이 너무 쓰고 싶었다.



요 며칠 글이 너무 쓰고 싶었다. 


그 마음이 써야 한다,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이 아닌, 쓰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이어서 기뻤다. 또 이 열망이 단순히 바람처럼 스쳐가는 얄팍한 열망이 아닌,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 온, 쓰기에 대한 번뇌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자 앞으로 쌓아 나갈 언어적 벽돌집의 단단한 기반으로서의 참된 열망이라는 것이 느껴져서 행복했고 설레였다.



그렇게 온 세상이 새벽이 남기고 간 빈티지한 푸른 공기 안에 젖어 있고 분주히 움직이는 자동차의 불빛들이 도로 위에서 고요히 반짝이는 아침, 하루의 이른 시작을 '사뿐하게' 글로 여는 날이 찾아왔다. '무겁게'가 아니라 '사뿐하게'. 여기서 잠시 타자를 멈추고, 며칠 전 생일 축하 겸 출간 기념으로 친구에게서 받았던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접시에 담아 볼까 한다.






케이크 조각 한 입을 우물거리는 동안 하늘의 빛깔이 한 층 밝아졌다. 언제나 머릿속에서 팔다리를 쭉 피고 대자로 누워 있던, 꼭 다루고 싶었던 소재가 있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이란 어떤 것인지, 나는 그에 어떻게, 그리고 왜 이끌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정리해 보고 싶었다. 몇 번 시도도 했었는데, 매번 새로 시작하고 조금 끄적거리다가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 이 소재에 대한 집념이 더욱 커지며, 첫 책이 출간되고 이후 다음 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전의 시기에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쓰고 싶은 글, 쓰고자 하는 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포기하게 하고, 더 많은 것을 욕망하게 만든 글. 내 인생을 쉼 없이 바꿨고 바꾸고 있는 글. 그 '글'을 보다 구체적인 한 가지 단어로 응축해서 표현해야 한다면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사랑한 모든 예술과 경험은 그것이 '이야기'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책도, 그림도, 음악도, 일상 속 풍경도,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인형과 함께 뛰놀던 친구들, 그에 동원된 모든 행위들이 '이야기'로 이해되었고, 상상되었고, 표출되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하나의 작품으로부터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느끼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이었다.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난해한 시각적 정보들이 주로 하나의 이미지 안에 압축되어 있는 미술 영역에서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 있으려면 다양한 관점에 대한 이해와 밀도 높은 지식이 필요하다. 대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은 지적으로 숙성되는 깊은 맛이 있다.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그 이야기를 내가 주도적으로 만들어 간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현대의 영역으로 갈수록 더욱 흥미로웠다. 



한편, 영화는 감상자의 입장에서 미술보다는 즉각적인 이해가 가능하고, 갖가지 감각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일깨우며 신속하고 강도 높은 충격을 가한다. 미술이 사유라면, 영화는 상대적으로 체험을 제공한다. 영화는 내가 생각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가장 가까운 매체다. 예술의 모든 요소들을 총집합시킨 이런 미친 예술 같으니라고. 내가 글을 쓰는 과정과 그에 따른 결과물은 그것이 꼭 시나리오가 아니더라도 영화 제작과 닮아 있을 것이다. 



음악은 내가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에 가장 직접적이고 본능적인 방식으로 강렬한 영감을 주는 매체다. 이야기에 대한 상상력은 자주 음악을 통해서 거침 없이 이루어진다. 음악은 가장 빠르고 쉽게 이야기의 분위기와 전체적인 줄기를 그려내거나 아주 세부적인 장면들을 직관적으로 떠올리게끔 한다. 내가 구상하는 모든 이야기에는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그리고 . 영상이 세상을 지배하고 도배하는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내가 가장 열광했던 매체. 그리고 다시 푹 빠져 버린. 책은 '이야기'의 원형이자 정수와도 같은 것이다. 구전에 비해 훨씬 높은 완성도를 갖춘. '이야기'를 제대로 쓰려고 보니 나는 어느새 책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책 만들기에는 단순히 글을 적는 것 뿐만 아니라 글자의 배열과 표지 이미지, 타이포그래피 등 글과 연계되는 시각적 디자인에 대한 고민들이 포함된다. 이 점이 미술과 글에 대한 나의 관심 모두를 충족시키면서 나를 강하게 이끌었다. 또한 과도한 사변과 기약 없는 글쓰기에 지쳐 있던 시점에 손으로 만지고 소유할 수 있는 실제적인 물체, 지성의 아이콘이자 아이템으로서의 책은 신선한 감각을 일깨워 주었고, 그것을 만드는 과정이 부여한 일련의 체계는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언급하는 이 '이야기'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제각각 귀히 특별한 것이다. 그것은 매력적인 인물들과 사건들이 벌이는 변주고, 여러 갈등이 터지며 하늘에 그리는 불꽃놀이고, 삶을 재미나게 재구성한 지혜로운 모형이고,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즉 살아내게 하는 거대한 힘이다.



이제서야 깨닫는 바가 있다면, 나는 그 거대한 힘을 좇아 이야기를 쓰고자 했던 것이다. 언어가 미숙했던 어린 시절에 그것은 마법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어린 내가 양털 러그 위에서 귤을 까먹으며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있을 때, 나만한 크기의 스케치북에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닷 속 인어의 그림을 그릴 때, 레고에 딸려 온 노트에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형상의 레고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적어 내려갈 때, 아무도 강제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기꺼이 행하게 만든 것은 당시에는 '마법'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힘에 대한 자발적인 이끌림이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 내가 다시 그저 순수하게 만들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그것이 내뿜는 '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쓸 힘이 나에게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고단함 속에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힘이 봄의 새싹처럼 작지만 존재감을 돋보이며 돋아나 나의 혈류를 타고 천천히 순환하고 있음을 느낀다.



힘. 자신으로부터든 타인으로부터든 무시와 질투와 경멸, 실패에도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는 힘. 갈등을 회피하거나 그저 처리하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더욱 단단히 결합시키고, 부정적인 기류를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힘. 스스로를 너무도 잘 알아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개인의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힘. 위계 없이 모든 순간과 사람이 평등하게 독보적인 가치를 갖는 힘.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빛에서 암점을, 암점에서 빛을, 한계에서 자유를 찾아내는 힘. 즉, 한마디로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서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내는 힘. 그 힘을 집중적으로 매섭게 파고드는 데에 '이야기'만한 것이 있던가.



'이야기'란 인물과 인물이든, 혹은 인물과 사건이든, 혹은 사건과 사건이든 서로 대립하고 충돌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야기'의 관점에서 우리가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갈등은 우리를 해치는 유해물질이 아닌, 삶을 추동하는 에너지로 기능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영원한 절망이란 없고, 영원한 고통도, 영원한 적도 없다. 또한 '이야기'가 삶을 다채롭고 창의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 이해할 때, 그것이 서로에게서 다른 것들을 얼마나 아름답게 잘 결합시키는지를 목격할 때, 삶은 틀린 단절들의 오합지졸이 아니라 우아한 연결의 연속으로서 인식되고, 비로소 그것은 뿌리 깊은 관계가 되고, 사랑이 된다.




나는 그런 이야기의 본질에 충실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형식은 그 다음이다. 소설, 시나리오, 동화, 그림책 등 다양한 형식을 투철하게 분석할 것이고, 끊임없이 배워 나갈 것이고, 자유롭게 다룰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질을 우선에 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삶과 나란히 걸어가게 할 것이다. 삶으로부터 이끌어 낸 이야기가 다시 삶을 끌어당기고 끈끈히 붙잡아 내는 힘을 생성할 수 있도록. 



그래서 다시, '이야기'만한 것이 있던가. 

나는 여태 이야기만한 힘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야기를 이야기. 

삶을 살아내는 한, 

앞으로도 쭉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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