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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꽃피 Jun 01. 2022

EXTRA CACAO

혈투, 글쓰기, 초콜릿.



오늘의 반나절을 생리통과 싸우는 데에 보냈다. 샤워를 하면 좀 나아질까 했는데, 샤워 중에 상태가 더 악화되어 그냥 누워나 있을 걸 후회를 했다. 가까스로 머리를 감은 뒤, 이러다 죽겠다 싶어 몸은 대충 씻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머리도 못 말린 채로 잠시 침대에 쓰러져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웠다. 아직 잠들 수는 없었다. 필라테스 선생님께 6시에 있는 수업 취소 문자를 보내야 했다. 문자를 전송하고 몇 분을 끙끙대다가 잤다. 자고 일어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은 괜찮아져 있었다. 다행이었지만 이럴 때마다 허탈함을 느낀다. 정말 죽을 것 같았는데 몇 시간 사이에 이렇게나 멀쩡해지다니.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나에게 있어 생리 기간은 대부분 무난하게 지나가는데, 이따금씩 극심하게 아플 때가 찾아온다. 배 안쪽이 꽉 막힌 것 같고 호흡하기가 어렵다. 서 있는 것도, 허리를 구부리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힘들다. 모든 자세가 다 고통이다. 생리도 이렇게나 힘든데, 산고는 대체 몇 배의 고통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생리를 하면 단 게 엄청 땡긴다. 저녁에 낮에는 엄두도 못 내던 한강 산책을 갔다 오면서 세 종류의 초콜릿을 샀다. 통증으로 하루를 날렸지만, 적절한 보상을 받는 느낌이다.





오늘의 유사-산고 경험을 '이불 안의 심연'에 써야 할지, '이야기를 이야기'에 써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이야기를 이야기'에 쓰기로 했다. 초콜릿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이불 안의 심연'에 쓰기에는 오늘의 엔딩이 너무 달콤하다. 또, 후끈한 증기 속에서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으며 말 그대로 '혈투'의 절정을 벌일 때, 이 고통의 순간이 마치 내가 지금까지 거쳐야 했던 이야기 쓰는 과정을 압축시킨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분명 좋았던 순간들도 있었는데. 결국 집필 기간은 뭐가 됐든 '고통'으로 집약되는 건가. '성장통'. '성장통'이라 하자.



막상 작업에 몰두하면 고통은 덜하다. 덜할 뿐 아니라, 즐겁고 설레고 뿌듯하기까지 하다. 진짜 고통은 작업을 시작하기 전이나 어떤 이유로든 작업을 하고 있지 않을 때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자칫 말려들면 시작 자체가 어려워진다. 이제는 제법 정신줄 잡는 게 수월해지긴 했다. 최악의 통증을 내가 떠난 이 글쓰기 여정에 비유할 만큼 그렇게 고통받으면서도 이제껏 버텨온 게 신기할 따름이다. 어떻게 버텼는지보다도 왜 버텼는지가 궁금하다. 작업 자체가 주는 기쁨도 있고, 세심하게 발전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빈번하게 찾아와도 그에 대한 명확한 명분이 있어서 좋았다. 아무런 이유없이 몸은 편하고 마음은 텅 비어 있을 때보다 간절함으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지금이 몇 배는 더 좋았다. 진짜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 살아간다는 느낌. 나의 모든 감정과 생각에 거짓된 것이 없는. 모든 게 밝은 진실로 빛이 나는.



전에는 밖에 산책을 나갈 때 옹기종기 모여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지금 대단히 잘못 살고 있나 하는 이상한 자학적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더 가벼워져야 하나 싶은. 지금은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게 바보 같고 우습다. 찬찬히 따져 보면 단지 많은 사람들과 있다고 해서, 그들과 웃고 떠든다고 해서 마음을 다해 행복했던 적도 없었으면서. 나의 시간을 밀도 있게 쓰는 것으로부터 사람들 속에서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을 채우고 있지 않나.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채우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 왜 그런 생각을 했나 싶다. 온 마음을 다해 의지를 발현시키는 삶, 내게 온 모든 것을 하나의 그릇에 아낌없이 쏟아붓는 일, 나는 그것을 얼마나 갈망했던가. 나에겐 저들에게 있는 것이 없지만, 저들에게도 나에게 있는 것이 없다.



언제부턴가 밖에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왁자지껄한 군중을 즐거운 풍경으로 느낀다. 또 더욱 선명하게는, 군중 속을 단단하게 걸어가는 나를 느낀다. 쉼의 순간들에도 무엇이 나를 둘러싸고, 내가 그 대상과 신호들을 어떻게 감각하는지에 집중한다. 세상에 빨려들어가는 대신, 나의 눈과 귀로 세상을 빨아들인다. 내가 되어 가고 있다. 나만의 길을 가는 나. 유일무이한 나. 그것을 위해 버틴다. 아니 버텼다. 이제는 나로 살아간다는 것이 고통을 감내하는 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고 있다. 넘어진 채로 있는 시간보다 다시 일어나 무언가를 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어디에 있든 나는 나의 편이 되어 주고 있다. 힘겨웠던 시간을 혀 안에 초콜릿을 부드럽게 녹여 가며 충분히 달랠 줄 안다. 통증이 아니었다면, 초콜릿이 아니었다면, 그 대조적인 두 가지 시간이 맞닿아 있지 않았더라면, 쓴맛과 단맛이 이렇게 궁합이 좋다는 사실을 알 수나 있었을까. 점점 어른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삶의 두 가지 맛을 충분히 음미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 가는 것 같다. 바라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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