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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연대 Jul 26. 2023

SF 리얼리즘: 기술은 발전하지만, 전망은 사라졌다

기술미디어칼럼 #4

일론 머스크가 그토록 자랑하던 테슬라 사이버트럭이 이제 출시된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5000억 달러를 들여 서울의 44배에 달하는 인공도시 네옴시티가 건설되고 있다. 인간 두뇌를 모방한 인공신경망이 발전하고, 그와 더불어 두뇌 자체를 물리적으로 모방하는 뉴로모픽 컴퓨팅이 등장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장은 무인화 지능 기계들이 지배하고 있고, 소설 <스타쉽 트루퍼스>에서나 볼 수 있었던 파워슈트를 물류노동자들이 입는다.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걸까? 전기자동차, 드론, 메타버스, 인공지능, 웨어러블, 스마트기기, 무인전투기, 우주망원경, 나노로봇, 양자컴퓨팅, 스마트시티, 유전자 가위, 인공강우…엄청난 기술 진보와 사회혁신을 온 몸으로 겪고 있지만, 삶이 나아졌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이미 SF를 앞질렀다. 사람들은 <터미네이터>나 <블레이드러너>의 투박한 기계장치와 인간주의, 메탈 음악과 사이버펑크를 오히려 노스탤지어처럼 느낀다. SF는 이제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소셜 픽션(Social Fiction), 즉 리얼리즘이 되어버린 것이다.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 중인 인공도시 '네옴시티'



노스탤지어는 한 사회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고개를 돌려 불안정한 미래를 외면할 수밖에 없을 때 발생하는 감성학적 국면이다. 기술 발전은 특이점을 향해 가고 있지만 낙관적이고 자유로운 미래, ‘앞으로 삶은 더 좋아질 거야’ 라는 전망은 온데 간데 없다. 우리가 <1984>나 <공각기동대> 같은 디스토피아를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참혹한 미래를 넘어서기 위한 유토피아적 외삽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SF는 미래의 고고학이자, 현재를 급진적으로 역설계하는 과학기술의 낙관주의다. 하드SF는 하이엔드 과학의 유희를 펼치고, 사이버펑크는 판옵티콘이 도시에서 탈주하는 시민의 대항문화를 집대성한다. 스페이스오페라는 활극과 판타지를 상연하며, 문화다양성을 이야기한다. 포스트아포칼립스는 ‘위험사회’라는 파국의 타나토스를 예방접종한다. 모든 기술적 발명에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충동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현재의 삶을 개선할 뿐 아니라 미래를 발굴하고,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전망을 만든다.


그런데 SF를 아득하게 넘어서버린 요즘의 하이테크 리얼리즘은 프로메테우스적인 상상력을 끌어안을 수 있는가? 오늘날 실리콘밸리·군산복합 중심 기술혁신은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복속되어 있고, 소수의 억만장자들과 테크노크라트들에 의해 선도된다. 제프 베이조스나 머스크 등은 화성 이주 프로젝트 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영화 <돈 룩업>이 보여주듯이 지구에 탈이 나면 로켓을 타고 도망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부자들뿐이다. SF 리얼리즘, 유토피아 전망이 제거된 자본주의 기술정치는 SF의 상상력을 훔쳐와 기상천외한 신기술을 백화점처럼 현혹하고 새로운 스펙터클과 헛된 믿음(예컨대 암호화폐로 억만장자가 될 수 있다거나, 100만 구독자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는 등의)을 퍼뜨린다. 우리는 온갖 기술의 향연을 누리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스마트폰을 마음대로 뜯어보지도 못한다.


△ 혜성 충돌로 인류가 멸종을 앞둔 상황을 그린 영화 <돈 룩 업>의 한 장면.


다시 말해 SF 리얼리즘은 불평등을 더욱 비가시화하고 은폐하는 자본주의 소셜 픽션으로, 화려한 기술을 내세워 여기에 순응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고 겁박하는 전형적인 기술 이데올로기다. 한국 사회는 이 분야에서 가장 선도적인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요즘 잘나가는 K-방산과 K-팝 등을 바탕으로 기술의 광적인 발전을 과시하면서,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노동·인문·예술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사회는 이상하리만치 신기술이 가져올 부정적 효과에 대해 아무 목소리도 내지 않는다. ‘일단 지르고 보자, 멈추면 뒤쳐진다’는 식의 강박적인 개발논리는 노동·생태·지역 및 불평등과 정의에 관한 문제를 뒷전으로 밀어낸다. 인공지능, 블록체인, 디지털 플랫폼 등 시민사회와 함께 논의해야만 하는 기술적 의제들에 대해서 한국 사회 전문가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건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도입되었을 때, 위험을 고스란히 떠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현장에서 일하고 노동하는 당사자들이다.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인간이 기술을 도구처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작업대에 인간을 올려놓고 닦달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자본주의 소셜픽션’을 넘어, SF가 리얼리즘이 아닌 유토피아 우화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기술의 진보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노동·예술·기후·인권·민주주의 영역에서 공동선을 이야기할 수 있는 담론장을 먼저 구축하는 것이다. 후쿠시마의 원전 오염수를 방류하는 데 과학자들과 관료들만 동의해서 되는가? 인공지능이 직업 현장에서 사용되거나 개발되는 과정에서 데이터 시민권은 지켜지고 있는가? 자동화 기술 도입 후 발생하는 일자리난에 기업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산업용 에너지는 원가 이하로 물쓰듯이 소비되는데, 시민들에게는 왜 누진세 폭탄이 부여되는가? 기후변화와 탄소 아포칼립스를 맞이해서 텀블러를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것 말고 국가 차원에서 어떤 규제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가? 우리는 자주, 어떤 기술적 대상이나 현상이 현실화되기 앞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의 진보가 사회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현우(기술문화연구자, 문화연대 집행위원)

정보기술 공간에서의 노동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연구하는 기술문화연구자이다. 플랫폼, 게이밍,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에 걸쳐진 IT 기술문화를 미디어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탐구한다. 문화연대 집행위원, 계간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과 기술, 기술비판이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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