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미디어칼럼 #5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자국민들의 반대와 주변국과의 외교 갈등을 무시하고 후쿠시마 원전 핵폐수를 태평양에 투기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국내의 과학계에서는 연일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도쿄전력과 공개한 샘플을 토대로 IAEA가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다핵종제거설비(ALPS)를 통해 걸러진 핵폐수의 방사성물질 농도는 국제안전기준에 부합하고, 인체 영향도 극히 미미할 것으로 전망된다. ALPS로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운 삼중수소(트리튬)의 경우에도 30년에 걸쳐 표준 이하로만 방류하면 아무 탈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우려와 반대가 있지만 과학자들은 대체로 이 분석 결과 자체에는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문제는 1리터의 ‘희석된 폐수’를 마셔도 괜찮다는 옥스퍼드대 웨이드 앨리슨 교수의 발언을 중심으로 국내 전문가집단이 핵폐수의 영향력이 괴담처럼 과장되었다는 음모론적 논리를 펼치는 데에 있다.
단골 레퍼런스로 등장하는 웨이드 앨리슨은 방사성 연구의 세계적인 석학인 것은 맞지만, 동시에 논쟁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수십 년간 지구가 직면한 기후위기와 탄소발자국을 두고 원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며, 태양열과 풍력은 오로지 파괴할 뿐이라며 재생에너지의 도입을 공공연히 반대해 왔다. 그의 2015년 저서 『Nuclear is for Life』의 제목에서 보듯이 앨리슨은 원자력 만능주의자이며, 심지어 ‘공동화되어가는 지방 소도시마다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해야 한다’, ‘방사선은 암의 원인이 아니다’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는다. ‘핵보다 불이 훨씬 위험하다’는 그의 말은 언뜻 일리 있어 보이지만 우리는 과학(science)과 회의주의(skepticism)을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스캡틱’이라 불리는 회의주의는 검증된 데이터와 팩트만을 판단의 준거로 삼고, 그 외의 담론이나 사회적 발화에 대해서는 철저히 공론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매우 위험한 태도이다. 리차드 도킨스가 창조론·유사과학론자들과 싸우며 구축한 스캡틱의 수사학은 이제 정치를 상실해버린(혹은 정치 과잉인) 과학이 위기상황에서 자기합리화를 위해 구조적 요인을 애써 무시하는 가증스러운 현실을 보여준다.
검증된 데이터와 팩트를 기반으로 사고한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반문할 수도 있다. 앨리슨의 발언을 잘 살펴보자. 그는 국내 전문가들과의 질의응답에서 반복적으로 ‘교육’이라는 표현을 썼다. “후쿠시마 방사선에 대해 잘못 교육해 사회에 공포를 조장했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 원자력과 관련된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 “안전하다고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 “제대로 교육되었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회의주의를 신봉하는 국내 과학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민사회가 핵물리와 같은 전문 영역에 무지몽매하고, 계몽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시민들이 함께 협의하고, 설득하고,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육의 대상이라고 보는 태도다. 스캡틱에 빠진 사람들의 전형적인 선민의식이 잘 나타난다. 하지만 과학의 본질은 시민사회와 함께 공동선을 추구하며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데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앨리슨과 핵폐수 투기 옹호론자들이 과학이 아닌 스캡틱의 화신이라는 점은 사회·정치 부문의 불확실성과 담론의 질서에 개입하는 힘관계등을 고려하지 않는 사고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들은 예컨대 도쿄전력이 공개한 샘플이 편향되게 수집되었을 가능성, 다핵종처리장치에 결함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 ‘그것이 결함이 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IAEA가 분석한 시료는 제 3자에 의한 교차검증 없이 일본이 제공한 샘플에서 그대로 채취되었는데, 이는 과학자들이 연구 결과를 공표하는 과정에서 기본으로 여기는 동료검토 절차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회의주의’가 아닌 ‘과학’의 판단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정답은 ‘위험 영향 평가가 시민사회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여전히 불확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핵폐수 투기를 일단 멈춰야 한다’이다. 맥락이 없는 데이터, 구조가 제거된 팩트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스캡틱이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을 개발하면서 끝없이 고뇌한 이유는 그가 사이코패스가 아니기도 하지만 내면의 시민적 자아와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과학은 프로메테우스적 측면을 추구하는 반면, 스켑틱은 프랑켄슈타인을 두고 기술적 합리성을 이야기한다. 요컨대 불이 원자력보다 무서울 수는 있지만, 불을 전쟁이나 가스실에서 사용해도 그 유용성 자체는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불보다 훨씬 무섭다.
핵폐수 투기 옹호론자들은 샘플의 교차검증 유무, ALPS의 결함 가능성, 혹은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에 의한 조작 가능성을 간과할 뿐 아니라 해양생태계에 미칠 영향력에 대해서도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한다. ‘삼중수소 수치가 평균 이하’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지만, 바다는 삼중수소-인간신체라는 두 행위자 간의 관계보다 훨씬 많은 행위자와 요인들을 동반하는 복잡계다. 지구의 70%에 해당하는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인간은 반도 모른다. 해양생물들이 세대를 걸쳐 축적하는 핵종의 위험성, 해류와 어류의 이동을 통한 전파와 다른 해양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변화 등의 요인도 있을 뿐 아니라 방사성 물질의 영향력이 ‘기준치 이하’ 라는 것은 ‘제로’라는 뜻도 아니다. 예컨대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 냉전 시대의 수많은 핵실험, 체르노빌과 스리마일 섬의 사고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그 영향력은 이번 세기를 넘기고 나서야 완전히 이해될 것이다.
‘불확실성’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려를 ‘괴담’ 이라고 몰아세우는 일부 과학자들의 태도는 몰지각할 뿐 아니라, 과학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생명윤리와도 대치되며, 0이 아닌 경우 최대한의 위험을 전제하고 과학적 사실을 공표하는 과학의 정신에도 위배된다. 언론사들을 불러놓고 데이터로 검증된 것이 없으니 대뜸 계몽이 필요하다며 국민들을 겁박하는 전문가들, 원자력을 에코모더니즘의 소재로 써먹는 해외 과학자 한 명을 신처럼 떠받드는 언론과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단위와 원리가 무엇인지 상기하는 일이다. 애초에 원자력 자체가 민주사회에서는 부적절한 기술이다. 결정권자 몇몇의 판단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간단히 빼앗을 수 있고, 철저히 중앙집권화된 시스템이 아니면 운영될 수가 없으며, 전문가집단과 테크노크라트들이 그 운용을 독점한다. 중국, 북한, 러시아같은 권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회가 좋아할 법 하다. 민주주의는 애초에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시스템이어서 기술적·도구적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민주정 안에서 스캡틱이 과학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당신들이 직접 ALPS 처리를 한 핵폐수를 떠와서 1리터 마신 뒤 12.3년(삼중수소 반감기) 후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저희도 군말 하지 않겠습니다.”
신현우(기술문화연구자, 문화연대 집행위원)
정보기술 공간에서의 노동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연구하는 기술문화연구자이다. 플랫폼, 게이밍,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에 걸쳐진 IT 기술문화를 미디어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탐구한다. 문화연대 집행위원, 계간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과 기술, 기술비판이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