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이념전쟁
<문화예술계 좌파를 척결하라. 돌아온 이념전쟁>
[목차]
1. 돌아온 블랙리스트 적폐세력, 유인촌의 귀환
2. 반복되는 문화예술 좌파척결 프레임
3. 윤석열 정부의 문화행정 길들이기
4. 이념논쟁은 문화정책의 미래가 될 수 없다.
지난 달, 윤석열 대통령은 신임 차관들을 임명하는 자리에서 통일부, 교육부, 환경부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를 ‘이념 부처’라고 언급하며 해당 부처들이 정치 성향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특히, 문화부의 경우 좌파 성향을 띈 시민단체들과 끈끈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으며, 좌파 인사들이 문화예술계를 오랫동안 장악해왔다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재오 전 의원이 행정안전부(행안부) 산하 기타 공공기관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사업회) 이사장으로 임명된것에 이어 방송통신위원장에 내정된 이동관 대외협력특보, 그리고 유인촌 문화체육특별보좌관(문화특보) 등 MB계 인사가 줄줄이 귀환하는 모양새를 띄고 있습니다.
2009년 문화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이론과 6개를 폐지하겠다는 감사결과를 내놓아고 이에 문화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학부모에게 유 특보가 “세뇌가 됐다”고 말하는 장면.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그 중 유인촌 특보는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인 2008년 2월부터 문체부 장관을 맡아 2011년 1월까지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장관직을 역임한 문화부 최초의 특보이자 유일하게 특보직을 맡은 인물로 문화부 장관에 재직하던 당시 막말 논란과 좌파 인사 찍어내기 등 여러 논란의 정치적 행보를 보여 온 인물이기도 합니다.
2008년 장관이 된 직후 그는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하며 전 정권 임명된 단체장 물갈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고, 한국예술종합학교 황지우 총장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김정헌 위원장 등 임기가 보장된 산하 단체장의 사퇴 종용하는 등 해임 사태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행보는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자행된 국가범죄인 블랙리스트 사건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번 유인촌 특보의 임명 소식을 두고 여야에선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 여권관계자는 "그동안 문화체육관광부가 여러 차례 개각 대상에 거론될 만큼, 돋보이는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며 "사실상 유일한 특보로서 문화예술계 영역 전반에 대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으며. 박성준 야당 대변인은 “유 특보의 임명으로 윤 대통령의 문화예술관은 명백해졌다”라며 “엄혹한 블랙리스트의 시대, 과거의 망령이 다시 돌아오고 표현의 자유와 창작의 자유가 사라진 폭정의 시대가 열렸다”라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문화부가 이념 편향적이고, 좌파 성향의 예술인들이 문화정책을 독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지난 정부인 문재인 정부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문재해결을 핵심 국정과제로 내걸었습니다. 재임기간 동안 문화행정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화하고, 문화행정의 권력을 배분하기 위한 노력들을 해왔습니다. 즉, 블랙리스트 운동은 특정 (이념)세력이 문화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한 문화와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이러한 과정이 문화권력을 우파에서 좌파로 이동시키는 과정인 것처럼 곡해하고 있고 이는 문화계와 문화정책에 대한 몰이해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윤석열 정부가 문화부와 같은 공공 행정을 이념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인촌과 같은 문제적 인물을 문화특보로 임명했다는 것은 향후 윤석열 정부의 문화정책 방향이 통합과 협력보다는 배제와 탄압의 형태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다시 말해 과거 블랙리스트 악몽이 윤석열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재현될 가능성이 큽니다.
문화예술계 좌파척결 프레임의 시작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2년 10월, 국정감사에서는 청와대가 작성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이 공개되어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은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에서 작성한 문건으로 좌파 문화권력을 척결하고 국민의식을 우경화하겠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해당 문건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JSA>, 임찬상 감독의 <효자동이발사>를 좌경화 영화로 꼽고 있으며, CJ·KT·SKT 등 영화자본과 협력해 ‘우파 영화제작’ 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 이명박 정권 당시 작성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 내용 중 일부
당시 국정감사에서 무소속 강동원 의원은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에 대해 “이 문건은 정인철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문화예술계의 좌파집단에 대한 인적청산을 실시하도록 제시"하고 있고 “문화부의 지시만으로 한계가 있으니 위원장을 교체한 이후, 위원장이 인적청산을 진두지휘 하도록 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 결과, MB정권 내 문화부 관련 47개 공공기관 주요 인사는 유인촌 장관을 필두로 정병국·최광식 장관 등 새누리당 또는 고려대·인수위 등 대통령과 연고가 많은 인사들로 채워졌으며, 좌파인사로 분류되던 김정헌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과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황지우 한예종 총장을 해임 조치하였습니다.
다시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발언을 하며, 좌파 문화예술계의 척결에 대한 의지를 스스럼 없어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만들어진 문화예술 좌파척결 프레임은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태로 이어졌고, 현재 윤석열 정부에서도 재현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에서 <문화융성 기반정비>로
▲ 박근혜 정부의<문화예술계 건전화로 '문화융성' 기반 정비> 문건
이러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은 박근혜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문화예술인들을 감시, 검열, 배제하는 블랙리스트 작성을 위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2013년, 박근혜 정부는 <문화융성 기반정비>라는 블랙리스트 입안 문건을 작성하였는데, 이 문건은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가 대통령 기록관에서 블랙리스트 관련 자료를 찾다가 청와대 민정수석 캐비닛에서 발견된 '캐비닛 문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문건에는 '문화예술계 내 좌파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회분영과 갈등을 지속적으로 획책하고 있어 문화융성과 문화예술계 건강성 회복을 저해"한다는 기조를 담고 있습니다. "문화예술계 좌파에 대한 편중지원-좌파의 헤게모니 장악-국론분열과 편향된 가치관 조장"이라는 과정을 블랙리스트를 통해 원천 차단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문건은 문화연대, 민예총 등 12개의 단체와 김미화, 김제동 등 17명의 대중적으로 인지도 높은 개인 명단을 리스트에 포함시킴으로써 구체적인 타겟을 포함하는 계획이라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특별한 명단이 없었던 이명박 정부 초기 블랙리스트 문건과는 이러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수만명에 달하는 블랙리스트 피해자를 양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좌파 고사를 유도하는 방식을 택했던 이명박 정부와는 다르게 구체적인 배제 과정을 통해서 좌파세력 점진적 격리 과정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는 좀 더 진화된 국가범죄의 형태를 보여주게 됩니다.
시간은 흘러 지난 2022년 대선 시기에 좌파척결 프레임이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당시 안상수 국민의힘 인천공동총괄선대위원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서 윤석열 후보의 부인인 김건희씨가 "존경 받는 아티스트로 거론되어야 할 분이 좌파들의 네거티브 프레임에 씌여 공격당했다"고 발언하며, 이에 대해 문화예술계 쪽에 좌파들이 많다는 것을 주요한 원인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좌파 중심의 문화계를 바꾸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 윤석열 후보 선대위를 도와주던 한 문화예술계 인사는 언론 인터뷰를 통하여 "우리가 이기면 문화예술 기관장 교체 등의 전반적인 물갈이는 필요한 것 아니냐"는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결국, 블랙리스트 사건이라는 뼈아픈 경험을 했음에도 보수진영의 문화예술계에 대한 인식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정권 교체를 통해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다는 흑백논리와 진영논리에 빠져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이 시기에는 헌법재판소가 블랙리스트는 민주사회의 근간을 훼손하는 중대한 범로 위헌적인 행위임을 명확히 하였고, 대법원도 김기춘, 조윤선 등 주요 범죄자들에 대한 유죄를 확정한 상태였지만, 이들은 아무렇지 않게도 반헌법적인 발언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가 집권한 이후 다시 한번 배타적 좌우 진영 논리와 블랙리스트가 우리사회에 부활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 6월, 문화부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영화발전기금 예산을 부실하고 방만하게 운영했다는 점을 문제 삼고 대대적인 감사를 진행했다. 대표적인 문제 사례로 ‘한-아세안 영화기구 설립운영 사업’을 꼽으며, 2019년부터 5년간 69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왔으나, 국가들 간에 합의 도출에 실패하며 예산낭비를 했다는 것이다. 또한 2022년 ‘독립영화 전용관 운영지원’ 사업에서는 신청자격 요건에 맞지 않은 상영관에 예산을 지원하고 자격요건을 완화했다는 것도 지적되었습니다.
문화부가 제시한 지적 사항들은 좀 더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만, 외부적 환경 요인이나 문화예술 생태계의 특성에 기인한 부분들이 있다. 그럼에도 문화부가 보도자료까지 내면서 영진위의 방만 운영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박보균 장관은 “영진위가 국민의 피와 땀이 들어간 혈세를 어처구니없게 낭비하고, 공모 심사에 있어 특혜 시비와 불공정성을 드러냈다”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는 점은 다른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들게 합니다.
비단 이러한 상황은 영화분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출판 분야의 경우 한국문학번역원이 수행하는 변역출판지원사업의 심사위원 구성과 심사과정의 공정성과 부실 운영을 문제 삼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세종도서 사업에도 도서 선정과정의 객관성과 공정성에 문제를 삼으며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어 두 기관에서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일들이 왜 하필 지금 일어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정부와 문화부가 산하기관들의 사업 운영에 대한 지적과 감사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적되는 점들이 해당기관의 엄청난 실책이나 비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사업 자체의 구조적 한계나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것들이 많았고, 최근에 밝혀진 문제라기보다는 고질적으로 지적받아온 문제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표적감사라는 의심마저 들게 합니다.
결국, 문화행정기관에 대한 정부의 날선 비판과 강도 높은 감사는 기관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해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의 이권 카르텔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과 맞물리며, 사실상 문화부 산하 행정기관들에 대한 일종의 길들이기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맥락으로 본다면 윤석열 대통령의 문화부에 대한 이념부처 비판은 문화부 행정관료들에 대해 블랙리스트 당시처럼 무비판적으로 정부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충직한 개가 될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이자 경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윤석열 정부의 문화행정 길들이기는 특정 영역에 대한 예산 삭감을 통한 공적 지원에 대한 배제와 민간협치기구의 무력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윤석열 정부가 주장하는 (문화에술계) 이권카르텔은 그동안 이전 보수정부에서 진행해온 좌파척결 프레임의 또 다른 변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작동되는 과정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방식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말하는 문화예술계의 좌파는 누구일까요? 실제로 이러한 문화예술계 좌파들이 세력을 만들고 담합하여 이권을 독점해왔을까요? 그동안 보수정권들이 제기해온 좌파 문화예술인과 좌파 문화예술 단체들은 특정한 세력으로 불리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단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도 아닙니다. 굳이 공통점을 뽑는다면 보수정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진 것 말고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보수진영에서 말하는 문화예술계 좌파라는 것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보수진영이 끊임없이 좌파척결 프레임을 고수하는 것은 문화예술계에 대해서 정말로 무지하거나, 아니면 또 다른 숨겨진 목적이나 효과가 있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과연 문화정책의 목표가 문화정책의 미래가 특정 세력의 배제가 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문화가 가지는 기본적인 가치 중에는 다양성과 포용성이 있습니다. 문화가 있기에 다양한 가치와 생각들이 공존하고,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교류와 상호 영향의 과정을 통해 사회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문화정책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차별, 배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문화예술계의 이념전쟁. 이제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