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미술-현장미술> 연재에 들어가며
파견미술-현장미술은 1980년대 민중미술의 전통을 계승했다. 군사독재 하에서 시대 비판적이고 민중참여적인 활동을 펼쳤던 민중미술운동의 역사와 전통을 21세기인 오늘까지 계승한 것을 파견미술로 설명하기도 한다.
파견미술 활동은 2006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이전을 반대하면서 대추리 마을 주민들이 강제철거에 반대하고 나서자, 문화예술인들이 마을에 들어가 주민과 함께 생활하고 마을을 문화예술 활동으로 채우면서 시작됐다. 이 때 만들어진 문화예술인들의 네트워크는 2007년 한미FTA반대, 2008년 촛불 시위에도 개별 작업으로 이어갔다.
2009년 1월 경찰의 강제진압과정에서 철거민들이 사망한 용산참사가 발생하자, 참사 현장으로 모인 문화예술인들은 참사당일 현장 작업을 시작으로 1년을 거리에서 철거민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했다. 참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강제 철거의 공간을 예술의 공간으로 바꾸며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펼쳤다.
2009년 용산참사현장 투쟁을 이어가던 시기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도, GM대우 노동자들의 투쟁도,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파견미술 작가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에도 부분적으로 결합하여 연대하였고 GM대우 노동자들의 투쟁 중 공장 정문 설치물에 고공농성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용산참사현장에 모였던 작가들은 한걸음에 부평에 있던 공장으로 달려갔다. 파견미술팀은 낮 작업을 마치고 노동자들과 함께 저녁식사자리에서 하청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청의 하청, 그리고 재하청, 마지막엔 결국 파견노동이라는 열악한 노동의 형태를 이야기 하였다. 월급은 얼마나 받나요? 순진한 질문을 던졌고 솔직한 답을 해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파견미술가들은 우스개 소리로 말했었다. “우리가 더 열악하구나. 우리는 파견미술이네 파견미술.” 자조석인 말이었다. 이처럼 파견미술은 노동의 가장 열악한 형태를 이야기하는 파견노동에서 따온 이름으로 문화예술인들의 처지를 고민하던 과정에서 나왔다. 재정적으로 열악한 문화예술인들의 생활은 겉으로 드러나는 작업물로 가려지기 쉽다. 작품을 만들고 제작하는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원청이 어디고 하청이 어디인지도 모를 작가들은 스스로 참사현장, 싸움현장에 달려간다. 문화예술인들의 역할은 때로는 소통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 모순의 당사자가 되기도 했다.
다시 용산참사 현장으로 돌아온 작가들은 다양한 작업들을 이어갔고 간간이 질문을 받았다. 함께 작업하는 분들을 뭐라고 부르나요? 단체인가요? 등의 질문을 받기 시작했고 파견미술 작가들은 노동의 가장 열악한 형태가 파견임을 인지했으므로 스스로 현장에 파견하는 작가들이라는 표현으로 함께하는 작가들을 파견미술팀이라고 불러달라고 답하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희망버스가 출발하기 전 파견미술팀은 사전연대를 떠났다. 설치작업을 하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함께 용접작업을 하며 조형물을 만들기도 했다. 설치된 작업은 홍보물로 만들어져 희망버스 탑승객을 모집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35미터 크레인 위에서 외롭게 싸움을 하는 노동자에게 힘을 주기 위함이며, 정리해고의 일터를 희망의 일터로 바꾸기 위함이었다.
파견미술팀의 움직임에 이어 조금 더 폭 넓은 연대의 작업이 이어진 것은 2012년 밀양송전탑반대 어르신들과 연대를 위한 SNS 번개 활동이었다. ‘붓 들고 투쟁!’ 이라는 홍보물을 만들어 함께 밀양으로 갈 것을 요청했고 전국 예술대학 학생들의 연대가 인상적이었다. 학내활동의 연장으로 사회적 연대 방식에 대한 고민과 농활, 빈활 등과 같은 형식이 아닌 예술대학 학생들만의 사회연대활동 고민의 하나로 ‘붓 들고 투쟁’ 밀양으로의 연대를 확정했다. 이들은 6명, 10명 단위로 그룹을 만들고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을 막고 있는 마을로 나뉘어 3박4일 일정으로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 사전에 아이디어 회의를 위한 모임을 갖기도 하고 디자인된 이미지를 공유하며 밀양연대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님도 있고, 그림은 못 그리지만 함께하고 싶다는 사람들까지 100여명의 참가자를 만들었다. 밀양에서 그림그리기는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며 이후 활동에 대한 다양한 방식까지 약속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2013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복직을 요구하며 서울 대한문 앞에 농성장을 차렸다. 여기에 ‘이어붙이는 뜨개농성’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이 있다. 이들은 농성장 천막과 주변 가로수를 편물로 덮는 작업과 뜨개질과 바느질로 엮어 만든 현수막도 제작했다. SNS를 통한 소통의 힘은 컸다. 개별 작업을 통해 바느질과 뜨개질 작업을 하던 작가들, 마을주민모임, 개인적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매주 대한문으로 모였고, 함께 만든 작업물은 대한문 농성장을 또 다른 방식의 농성으로 만들었다. 이런 수작업의 연대는 자투리 나무를 이용한 목공작업, 작은 주머니 텃밭, 노동자의 작업화를 이용한 화분 등 차츰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해군기지건설이 한창이던 제주도 강정마을에서는 천주교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한 신자들과 주민들의 저항의 공간이 운영되고 있었다. 구럼비 바위를 파괴하고 펜스를 쳐 놓고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벽을 만들어 놓은 마을 안에서 매일 생명과 평화를 위한 미사를 올리며 해군기지건설의 위험을 알려나갔다. 하지만 공사장 앞 미사천막은 늘 공사 용역에게 철거 위협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대한문 농성천막을 뜨개로 덮은 이들은 다시 강정으로 보낼 뜨개질을 시작했고, 전국에서 우편으로 보내준 뜨개편물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대한문에 모인 사람들은 이어붙이는 뜨개농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정마을로 향했고, 해군기지 공사장 곳곳을 일상의 연대로 저항하고자하는 뜨개편물들로 감싸며 일상의 연대투쟁을 만들기도 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자, 일상의 연대하던 이어붙이는 뜨개농성팀은 SNS에 페이지를 만들고 다시 사람들과 함께 마음을 모았다. 문화예술인들은 연장(각자의 연장(붓, 사진기, 펜 등)을 들고 전시(전투)라는 뜻으로 연장전을 준비하였고, 이들은 광화문 광장과 안산에서 기획전시와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다양한 영역의 예술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했지만 이 행위는 하나의 묶음으로 나타났으며, 세월호 사건을 참사로, 학살로 인정하라는 정부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자 추모와 연대의 마음이 모인 것이다.
2016년 가을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알려지고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촛불이 일어나자 문화예술인들을 필두로 광화문에 텐트촌이 만들어 졌다. 142일간의 노숙농성은 80년대 거리에서 밝혀온 민중미술의 1세대들부터 현재진행중인 다양한 현장예술인들이 어우러진 한마당이 되었다.
이처럼 파견미술은 민중미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사회의 모순이 가장 치열한 현장에서 예술 활동의 진실한 힘에 삶의 목소리를 담아서 전개되고 있다. 2000년 들어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불안정 노동과 빈부격차의 확산, 한미FTA와 자본의 세계화, 규제완화로 인한 불안전 사회의 확산 등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야기한 현실을 비판하며 모순의 현장에서 발로 뛰는 문화예술인들의 자발적, 의식적 활동이다.
또한 파견미술은 계몽적이거나 교육적인 활동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와 주체들이 중심이 된다. 활동 내용도 그림에 국한되지 않고, 사진, 글, 연극 등 다양한 양식을 포괄하며, 뜨개질 같은 생활 창작까지 포함한다. 예술인은 물론 현장의 주체와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창작 활동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광장 중심의 대중적인 문화예술운동이다.
앞으로 문화연대 문화빵을 통해 2009년 이후 진행해온 다양한 파견미술작업들을 소개하고자한다. 여기에 소개되는 글은 많은 노동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미술(예술)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