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끝나지 않는 전시
용산참사 연재 마지막 글
기록과 보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용산참사 현장을 정리하면서 든 생각이다. 울음이 멈추지 않던 남일당(용산 참사현장) 분향소를 철거하고, 소소하게 웃으며 일상을 이야기하던 식당을 정리하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레아(고 이상림 씨가 운영하던 가게)1층의 전시장과 카페를 철수하고, 치열하게 논쟁하고 기획하던 2층 용산참사범대위 상황실의 집기들도 하나둘 들어낸다. 장례를 마치고 모아둔 만장과 건물 외벽에 설치했던 현수막과 조형작품들도 떼어낸다. 긴 시간 함께한 시간들을 정리한다.
파견미술팀은 용산 참사현장 곳곳에 남겨진 것들을 모았다. 돌아가신 분들의 영정이미지가 새겨진 펜스 조각, 용산포차에 설치했던 냉장고, 칼도마, 간판들과 레아건물 내벽 타일, 외벽 데코 철재물, 거리에 높이 걸린 현수막들과 버려진 의자까지 참사의 기억을 차곡차곡 모았다. 현장이 사라지고 높은 빌딩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용산참사의 기억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고 참사의 진실 또한 묻혀버릴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에 파견미술팀은 바쁘게 움직였다. 자료를 모으는 내내 문화예술인들의 사회적 연대가 주는 의미, 그것의 역사성 등을 어떤 형태로 남겨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용산을 떠나는 철거민과 유가족들에게 작지만 소중한 기억의 선물을 만들고 싶었다.
파견미술팀은 용산 참사현장 시각기록을 중심으로 책을 만들기로 했다. 책의 정리는 송경동 시인이, 사진자료 정리와 취합은 전미영과 이윤정, 나규환이 함께 했고, 디자인 편집은 참사현장 곳곳에 만들어진 현수막과 추모문화제 걸개 이미지를 만들어주던 이원우 웹디자이너의 도움으로 완성했다. 책 제목은 <끝나지 않는 전시>
용산 참사현장에는 많은 예술가가 함께했다. 지난 어떤 투쟁의 현장보다 더 많은 작가가 함께했다. 만화가 김홍모를 포함한 만화가들이 유가족을 만나 인터뷰하고 그것을 엮어 <내가 살던 용산>을 만들었고, 젊은 작가모임 69작가선언은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 역입니다>를 출간했다. 르포 작가들이 용산참사 초기부터 철거민들을 만나고 써내려간 <여기 사람이 있다>와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달력을 만든 사진가들, 이들의 작업은 모두 용산 참사를 기억하는 기록이고 역사가 되었다.
추운 겨울 책을 만들기 위해 사부작사부작 자료를 모으고 내용도 생산하고 함께했던 분들에게 서평과 연대의 글도 받았다. 지난 1년여 간의 방대한 사진자료를 분류하기 위해서는 컴퓨터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용산참사 1주기 추모제가 얼마 안 남은 시기였고, 파견미술팀은 유가족과 철거민, 상황실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날 책을 전달하고 싶었다. 용산 참사현장에서 철수하고 나온 후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모두 볼 수 있는 날은 별로 없었다. 마을 공동체가 한순간에 사라진 기분이다. 급하게 모인 파견미술팀은 PC방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밤을 새우며 사진자료를 정리했다. 1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책에만 집중했다.
2010년 2월 8일은 돌아가신 철거민 열사 다섯 분의 음력 1주기가 되는 날이다. 봉분이 채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마석 모란공원에서 1주기 추모를 했다. 그래도 장례식장 냉동고보다는 포근하게 보였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봉분 위를 감싸고 있었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전진경은 장례식에 썼던 열사들의 영정 이미지 원본을 액자에 담아왔다. 다섯 개의 봉분 앞에 다섯 개의 영정과 다섯 권의 책이 나란히 놓였다.
파견미술팀이 모아낸 용산 참사현장의 기억들은 이 후 <미영씨가 시킨 전>이라는 이름으로 성신여대 조형관과 국회 의원회관 로비 전시로 이어졌다. 용산참사의 진실이 가려진 채 장례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구치소에 수감된 철거민들의 죄목은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치사였다. 여전히 망루의 화재와 죽음은 모두 철거민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진실을 외면하는 국회의원들에게 용산참사의 진실을 제대로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전시준비로 바쁘게 움직이던 파견미술팀에게 국회 의원회관 관리자가 다가왔다. “저기 걸린 저 만장은 걸 수 없습니다.” 만장에는 “MB 너를 죽이고 가마” 라는 글귀가 써있었다. 장례식에 사용되었던 만장이다. 실랑이가 생겼고 현장성을 위해서는 그대로 두는 것이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시준비가 마무리되고 오픈식을 하는 날 결국 만장을 모두 묶어 글자가 보이지 않게 만들고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전시제목이 왜 <미영씨가 시킨 전>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우리는 다시 '시켰다'는 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시켰다'는 보통 시킴을 당한 이를 전제로 하기에 쉽게 수동적인 대상들을 떠올리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어데, 작가들이 그렇게 코뚜레 뚫어놓은 소 마냥 마음대로 움직여 주던가. 전시제목은 그만큼 역설적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제아무리 미영씨가 시켰더라도 그에 기꺼이 응하는 이들의 반응이 없었더라면 예술이 사회의 가장 뜨거운 곳에서 세상의 치부를 홀랑 까뒤집어 보여주는 격렬함을 일상적으로 접하기 어려웠으리라.(카톨릭뉴스 지금여기)
시간은 계속 흐르고 또 1년이 지나간다. 이제 용산참사의 기억은 매년 몇 주기 사업으로 돌아보게 된다. 그간 철거민들의 재판은 계속됐고, 상황실 활동가들도 대부분 기소되어 수백만 원의 벌금과 징역1년에 집행유예2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이종회와 박래군은 경찰에 출두 했으나 서울중앙지법 형사 12단독(판사 이숙연) 재판부는 일반교통방해 및 집시법 위반에 대해 유죄라며,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박래군)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종회)의 중형을 선고했다. 이후 이들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오늘의 석방은 비록 보석신청에 의한 석방 이지만, 우리는 이들의 무죄를 확신한다. 이는 용산투쟁이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거룩한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용산투쟁과 관련하여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가, 인권이, 정의가 감옥에 갇혀있다. 특히 살인적인 개발에 맞서 망루에 올랐다가 무자비한 살인진압의 피해자가 된 철거민들은 여전히 참혹한 그날이후 감옥에 있다. 지금이라도 구속자 전원을 석방하라! 용산투쟁은 정당하다! 철거민은 무죄다!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를 즉각 석방하라!(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 제도개선위원회)
눈 내리는 2011년 겨울, 나규환의 작업실은 온통 철 구조물로 가득하다. 용산참사로 돌아가신 다섯 분의 영정 그림과 부활도가 놓여있다. 용산참사 2주기를 준비하는 중이다. 마석 모란공원에 설치할 추모 조형물이다. 조형물의 이미지는 장례식에 사용됐던 이윤엽의 부활도를 모티브로 했다. 이윤엽은 부활도를 제작할 당시 함께 있던 파견미술작가들에게 포즈를 취해 보라고 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희망을 담아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표정연기까지 시켰다. 함께 만들어 나가는 즐거움과 만들어진 작업이 또 다른 형태의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매우 흥미롭기도 했다.
추운 겨울 땅이 꽁꽁 얼어버린 마석 모란공원은 조형물을 설치하기엔 최악의 상태였다. 삽질을 해보지만 땅이 파지지 않는다. 언덕위로 올리기 위해 크레인을 불러야했고, 주변에 있는 다른 열사들의 봉분에 피해를 주면 안 되기에 매우 조심스럽게 조형물을 이동했다. 설치가 마무리된 묘지 주변으로 환한 웃음이 번졌다. 열사들의 웃음이다. 진실은 꼭 밝혀진다는 의지의 웃음이다. 1월 20일 2주기 추모제에 맞춰 제막식을 했다. 유가족들은 또 눈물을 흘린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듯 그렇게 흘러 내렸다.
파견미술팀에는 미술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가도 있고, 시인도 있다. 파견미술팀은 누구누구라고 꼭 집어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때 그 시간 뜻을 함께하며 활동하는 모두가 파견미술팀이다. 파견미술팀은 꼭 함께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현장에 함께하는 문화예술인 모두가 파견미술팀이다. 용산참사로 만난 파견미술팀은 이후로도 지속적인 연대를 만들어 갔다. 시간이 흘러 파견미술팀은 고유명사처럼 쓰이지만 파견미술이라는 일반명사로 더 많이 쓰이고 활동되기를 소원해 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