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다
장례날짜가 잡혔다. 1월 9일. 앞으로 일주일간 상황실도, 유가족도, 파견미술팀도 엄청 바빠질 것을 알고 있었다. 상황실에서 장례준비 기획을 짠다. 그리고 파견미술팀과 제반사항에 대한 논의를 한다. 상황실에 속한 필자는 영결식, 노제, 입관식 장례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짜고 이미지를 요청하고, 추모공연도 준비해야했다. 장례 경험이 많은 분들과 행렬도를 만들고 거기에 필요한 영정그림과 부활도, 만장, 신위 등을 제작해야 한다.
파견미술팀 전미영은 만장제작을 위해 주변의 작가들과 소통하고 일정을 잡았고, 이윤엽은 부활도를 제작했다. 부활도는 용산참사로 돌아가신 철거민 다섯 분이 서로를 의지하고 웃으며 부활할 수 있기를 소원하는 이미지다. 행진용 영정은 전진경의 그림으로 만들었고, 신위는 끝나지 않는 전시에 참가한 김성건 작가의 도움으로 완성됐다. 만장은 출력하지 않고 작가들이 용산 참사현장에 모여 한 장 두 장 직접 써냈으며, 160장의 만장을 하루 만에 완성했다. 날이 너무 추워 밖에서는 장작을 피워 놓고, 건물 안에는 난로를 피워 손을 녹여가며 작업했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용산 참사현장의 하루는 색색의 만장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용산참사 철거민 민중열사 범국민장'은 2010년 1월 9일 오전 9시, 순천향대학병원에서 발인을 시작으로, 장례행렬은 수배중인 호상 3인이 있는 명동성당을 들러, 서울역광장에서 영결식을 엄수했다. 영결식 후 용산 참사현장에서 노제를 지냈고, 다섯 열사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용산참사 범국민대책회의 홈페이지)
상황실에서는 처음 서울광장을 영결식 장소로 고민했고 서울시에 협조요청을 했었다. 돌아온 답은 서울시청 앞 광장은 이미 승인된 행사가 있어서 어렵다는 것이었고 조정할 수 없다는 거였다. 정부와 장례관련 협의내용은 최대한 협조한다는 것이었으나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참사이후 1년간 용산 현장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고 사과나 위로도 한 적이 없었다. 장례식 당일 순천향대학병원(용삼참사 다섯 철거민 희생자를 1년간 모셨던 병원)으로 조문을 왔지만 서울광장 사용 등에 대한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고 결국 유가족의 항의에 쫓겨나듯 분향소를 빠져나갔다.
장례식 당일 새벽 6시, 파견미술팀은 제일 먼저 서울역으로 나갔다. 이미 경찰 병력이 쫘악 깔려 있었다. 목자재를 내리고 부활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경찰은 바싹 다가와 위협적인 말투로 하나하나 물어보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1시간여 만에 완성된 부활도를 이동하려하자 경찰이 우르르 몰려와 길을 막아섰다. 파견미술팀은 항의했고 몇 십 분의 실랑이 끝에 부활도를 무대 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도대체 정부가 최대한 협조한다는 건 무엇이었나 싶다.
같은 시간, 장례식장에서는 발인식이 진행되었고, 바로 장례행렬이 움직였다. 행렬은 순천향병원->국립극장->장충단공원->퇴계로->서울역으로 이동하여 12시 정각 서울역 영결식장으로 간다. 조금 서둘러 움직인 행렬은 퇴계로 인근에서 잠시 멈춰 섰다. 유가족 다섯 분이 행렬에서 빠져나와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명동성당에는 용산참사 범국민대책회의 공동집행위원장 이종회, 박래군과 전국철거민연합 대표 남경남 등 용산참사 범국민추모제를 주도한 사실과 철거민들이 망루에 올라가게 했다는 이유로 수배된 세 사람이 있었다. 정운찬 총리가 장례식장에 조문을 왔을 때, 수배자 3명이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경찰의 방해를 뚫고 유가족들은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유가족과 수배자들은 지난 1년간의 설움이 쏟아져 나오듯 눈물을 흘렸고 서로를 위로했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유가족은 다시 장례행렬로 합류했다.
서울역에서는 영결식 준비가 한 창이다. 무대를 만들고 음향을 체크하고 공연자들의 리허설과 의자 배열을 하고 있다. 파견미술팀 전미영과 나규환은 망루를 지을 때 쓴 펜스를 조그맣게 오려 철 피켓을 만들고 “철거민을 풀어줘요” 피켓팅을 위해 서울역 곳곳을 걸었다. 이들의 머리에는 법관을 상징하는 망치와 망치대가 모자처럼 올려져있다. 구속된 철거민들은 용산참사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죄로, 참사의 책임이 철거민에게 있다는 이유로 길게는 5년, 짧게는 2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망루 속 화마에 생사를 오가던 이들이, 검게 그을린 얼굴로 경찰차에 끌려들어가던 참사 당일의 기억이 생생하다.
영결식을 마치고 참사현장까지 추모행진을 했다. 대오를 정비하고 도로 쪽으로 이동하던 사람들은 또다시 경찰의 벽에 가로막혔다. 부활도의 크기를 문제 삼았다. 실랑이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는 경찰의 태도는 장례식을 하라는 건지 아니면 더 싸우자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시비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노제를 준비하는 용산 참사현장에서도 무엇하나 쉽게 진행되는 일이 없었다. 노제 차량이 설치되어야할 도로 쪽을 막은 경찰은 자신들이 정해주는 위치로 차를 대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며 끝까지 장례식을 방해했다. 조금씩 흩날리던 눈발이 점점 세지고 있었다.
"용산 남일당은 열사들이 경찰특공대에 의해 참혹하게 희생된 곳이다. 경찰의 헬멧이 보이는 것 자체가 장례의식을 방해하는 것이고 유가족들을 흥분시키는 것이다. 열사들을 편히 보내지 못하게 하는 짓이다. 경찰 헬멧들은 빨리 시야에서 사라져라." (용산참사범국민대책회의 대변인 홍석만)
우여곡절 끝에 노제는 시작됐고, 여기에 참석한 모두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 되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정부와 합의한 최소한의 내용조차도 무참히 밟혀버린 장례식 하루의 폭력만으로도 지난 1년간의 힘겨웠을 삶이, 투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억울함을 머금은 채 이런 수모를 겪으며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것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노제는 밤늦게 마무리 됐고 하관을 위해 장례위원과 유가족은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으로 향했다. '용산참사 철거민' 민중열사 다섯 분은 유가족의 오열 속에 차가운 땅 속에 안장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