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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연대 Sep 13. 2021

파견라떼

용산참사, 2009년 12월32일

1월, 기온 영하 10℃. 남일당 건물(용산참사 현장)은 8차선 한강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바람이 세다. 그래서인지 체감온도는 상상하기도 싫어진다. 손발이 꽁꽁 얼고 얼굴근육이 움직이지 않는다. 2009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용산 참사현장에서는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작품을 전시하면서 유가족과 연대하고, 시민과 소통해왔다. 수십 명의 예술인은 자발적으로 갤러리에 작품을 걸었고, 철거현장 곳곳을 서성이며 닥치는 대로 작업을 했고, 공연을 했고, 시를 읊었다. 24시간 하루도 빠짐없이 철거용역과 경찰은 감시와 협박, 욕설을 해댔다. 그 속에서도 시민과 예술인들은 당당했고, 어느 순간 이런 일이 그저 일상의 모습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가끔 용역을 보고 아는 사람인줄 알고 반갑게 인사를 하기도 했지만 이내 돌아서서는 머리통을 쥐어박곤 했다.    


용산참사는 해가 바뀌는 시점까지도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파견미술팀은 해가 바뀌는 12월31일을 준비하기로 했다. 600개의 등불, 600개의 등불은 용산참사 희생자 다섯 분과 경찰 한 분을 의미한다. 600개의 불을 밝히는 것은 한 해를 함께 보내고 새해에도 용산참사를 잊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등을 준비하고, 전선을 연결하고, 한지로 접혀있던 등갓을 펴서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레아(고 이상림씨가 운영하던 가게)건물 외벽에 설치작업을 했다.   


손등을 호호 불며 600개의 등을 만들던 12월29일 정부와 서울시 그리고 용산대책위는 지난한 협상의 종결 점을 찾았다. 1년 여간 장례식장 냉동고에 누워있던 열사들의 장례를 위한 최소한의 합의를 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협상 소식에 수많은 언론사들이 몰려왔고 취재 온 한 언론사의 인터뷰에서 당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기분이 안 좋았다. 진상규명이 전혀 안됐지 않나. 그런데 1년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으니까 유가족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그래서 이번 협상은 일단 장례를 치르자는 의미에서 이루어진 거라 보면 된다. 진작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 이제 겨우 진행된 거니까 '기쁘다'는 표현을 쓸 수는 없다. 협상을 정운찬 총리와 서울시가 나서서 했지만 우리가 요구했던 건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였다. 언론에서 '타협'을 했다고 말하는데 듣기 좋지 않다. 우리 입장에서는 '타협'이 아니라, 최소한의 단계를 거친 것이다. 승리라고도 할 수 없다.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라고 생각한다. 1월 9일 국민적 애도 속에 돌아가신 철거민들의 장례를 엄수할 것이다.”     

12월31일은 그냥 2009년을 보내는 마지막 날이 아니었다. 끝나지 않은 용산참사, 우리에게 2009년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는 것이라는 의미로 추모제 제목을 12월32일로 정했다. 10년, 20년, 30년이 걸리더라도 진상규명이 되는 그 날까지 투쟁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장례를 치루고 용산참사 현장을 떠나야했지만 모두들 최선을 다해 준비하기로 했다.     

파견미술팀은 레아 건물 1층 레아 갤러리에서 진행하던 <끝나지 않는 전시>의 마지막 회를 준비했다. 운이 좋게도 마지막전시에 참여하게 된 나는 그간 한 번도 해보지 않던 전시작가로 참여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 졸업전시회 이후 처음이었다. 전시 제목은 <미인전>이다. 힘겨운 일상에 위트가 넘치는 제목이다. 정윤희, 박정신, 신유아 3명의 여성작가전이다.   


갤러리가 만들어진 3월부터 마지막 전시까지 총 22회의 전시와 42명의 작가가 전시에 참여했다. 다양한 문화예술인이 이곳에서 작품을 전시하면서 유가족과 연대하고, 시민과 소통해왔다. 2010년 1월20일 용산참사 1주기를 마지막으로 갤러리 문도 닫았다. 아니 문이 닫혔다.    


‘12월32일 추모제’는 조용하게 시작되었고 자정을 알리는 시계소리에 맞추어 600개의 등에 불을 밝혔다. 등이 켜지는 순간 함께 자리한 모든 사람은 환호성과 눈물이 뒤엉켜 서로의 등을 두드리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서글픔과 억울함의 눈물, 치열했던 지난 1년의 힘겨움을 회상하는 눈물, 장례를 치루지만 진상규명도 진정한 사과도 받지 못한 분노의 눈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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