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숙론> 해보는 밤
Discussion*은 남의 얘기를 들으며 내 생각을 다듬는 행위다.
이걸 요즘 우리는 ’토론‘이라고 번역해 사용하는데, 지금 (한국에서) 우리가 하는 토론은 서양의 discussion과는 많이 다르다.
… 토론은 끝장을 보려 도모하는 행위가 아니다. 기어코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결기로 충만하면 남의 혜안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없다.
… 마음속에 나 자신이 너무 많아 타인의 생각이 비집고 올 틈이 없다.
지금 (한국에서) 우리가 주로 하는 행위는 debate에 가깝다. … 논쟁 수준에도 못 미치는 ‘언쟁’, 즉 치졸한 말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다.
- <숙론> 15~16p, 최재천
* Discussion은 영문사전 기준으로 ‘논의 / 상의 / 의논‘으로 번역한다.
오랜만에 지정도서 독서모임을 다녀오는 길, 최재천 저 <숙론>을 진작에 읽었지만 궁금한 점이 있어 회식도 제쳐놓고 갔던 일정이다. ‘숙론’ 자체에 대하여, 그리고 이 책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날, 같은 모임에서 먼저 의견을 밝힌 사람들과 같이, 나 역시 전적으로 이 책(숙론)에 대해 동의하는가 하면 - 그렇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하기 쉽지 못했다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겠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책의 전반에 저자의 주관적 기준에서 서술된 점이 상당히 많고, 예시들 역시 꽤 예전에 있었거나(국내 사례 역시 포함해서), 해외-미국 엘리트 고등학업 시스템(하버드 등)이라는 점 때문이라 했다.
이어서 ‘숙론’이라는 새로운 용어 정의와 관련해, 그것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점들 역시 저자의 관심사를 열거하는 것에 머무는 것처럼 느껴졌다는데 - 이러한 점들로 인해 ‘숙론’에 대해 바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졌다고 보였다.
앞서 적은 것처럼, 그날 독서모임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과 저자의 단언적인 의견에 대해 전적으로 다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려 했던 이유, 그리고 동시에 책을 읽어가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은 바로 ‘태도’와 ‘마음’이었다.
독서모임이 열리던 날에도, 또다시 ‘태도’와 ‘마음’을 생각하게 해주는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한 4년간 여러 자발적 모임(특히 독서모임)을 다니면서, 다양한 답정너를 보아왔는데, 이날 <숙론>을 포함해 참여자들의 모든 의견에 반박을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말이다.
대부분 초면이기도 하고, 다들 주말 늦은 밤에 자진해서 회비며 시간을 내어 모인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던 까닭에, 되도록 그와 같은 파트에 대해서 말을 삼가고 부딪히는 일을 최대한 줄이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말미에는 나의 생각에 대해서도 열심히 치고 들어왔다.
그 밖의 다른 참여자들은 열심히 자기 의견을 내주셨고, 진행자 또한 자연스럽게 반박자와 다른 이들 사이 중재를 해주었지만, 그럼에도 이날의 모임은 역대급으로 어려웠다.
이따금 심사나 평가를 다니다 보면, 자기 기준과 의견을 강하게 밝히면서 평가대상자고 간사고 뭐고 없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경험상 보면 4~6개월 사이에 꼭 한 번은 이런 ‘사건’이 벌어졌던 것 같다.), 그때뿐 아니라 전현직의 회사에서도 나이를 불문하고 이런 ‘강짜’가 부리는 사람이 한두 명씩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말한 그대로’ 수용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말한 것을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러한 자리나 회사에서 평화(그가 잠잠한 상태)는 곧 그들이 말한 것에 대한 ‘100% 수용’ 밖에 없었다.
그 ’전적인 동의‘ 외에는 일말의 중도나 조율조차 잘못된 것이라며 난리가 벌어지곤 하는데, 이게 아주 난감한 게 어떤 법이나 제도, 계약 등으로 제한된 사안에 대해서 조차 자기가 옳고 자기가 주문한 대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며 발라당 눕다시피 할 때이다.
지난달 푸닥거리를 한바탕 마치고 잠깐 티타임을 하는 동안, 어떤 학부모위원회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었다. 그 예시는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위에 일반화해서 적어놓은 것과 일치했다.
학부형 위원 9명이 동의한 사안에 대해서도 자기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며 난리를 치는 학부형 A으로 인해, 결국 그 자리를 마무리하고자 A가 바라는 대로 정하고 마무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었다.
한편 그 학부형A가 의외의 역할을 했던 지점에 대한 에피소드가 한 세트였다. 위원회 모임 외에 ‘독서모임‘을 열었는데, 누가 옳거나 그른 것도 아니며 모두의 의견이 다 나올 수 있는 자리에서 학부형A는 역시나 솔선수범해 자기 생각이며, 입장, 속마음을 막 쏟아내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가 그렇게 포문을 여니 다른 학부형들도 자연스레 속마음을 하나둘 꺼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례였다.
(물론 그럼에도 위원회에서는 그처럼 강짜로 행동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신이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들도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 Larry King의 말, <숙론> 199p, 최재천
‘이를 악물고 (일단) 들어라’라는 계명이 있다.
… 제법 성공한 CEO로 평가받은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어금니가 아프도록 악물고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답한다.
- <숙론> 197p, 최재천
요 몇 년 사이 도처에서 이러한 강짜배기-이들을 지켜보며, 결국 자존감의 부족,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경청에 대한 갈증이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숙론> 독서모임에서, 그의 무한태클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유감없이 다 쏟아냈다.
예의 학부형들도 그렇고, 강짜배기들이 자기 말을 들으라며 떼를 쓰는 것에 대해, 그냥 가만히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번에 참여했던 <숙론> 독서모임의 참여자들은 마냥 착한 말만 하는 사람들은 분명 아니었고, 자기 기준이 있는 어른들이었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실례나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쓰거나 배려를 하는 성숙함이, 그리고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 동안에도 말을 자르지 않고 가만 두는, 자존감 있는 어른들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자기 기준에서 선별해 듣는 것, 그것은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흘려듣는 것일 수도 있다.
독서모임이 내게 준 기회처럼, 전혀 접할 일이 없는 책,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과 접점 역시, 내가 그것을 수고를 들여 마주해보느냐 아니냐에 따라 분기로 나뉘어진다.
혼자만의 세계, 내지는 항상 만나는 ‘편한 사람/것’에 빠져 확증편향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굳이 애써 생소하거나 새로운, 남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시도다.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오랫동안 편견의 원인과 예방에 관한 연구 끝에 기적적인 치유법을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놀라운 치유법은 다름 아닌 접촉contact이었다.
- <숙론> 201p, 최재천
이 책 <숙론> 역시, 실제로 공감 가는 방법론, 저자를 비롯한 다른 선각자들의 혜안과 사례들이 담백하고 쉬운 문장으로 담겨있다. 하지만, 이 문장들 역시 독자가 우선 자신의 기준과 생각을 내려놓지 않으면 자문자답이 시작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억지로라도 마주해 보는 시도가 필요하다. 나의 의견을 앞세우기 전에, 우선 그걸 내려놓는 훈련이 절실한 것이다.
<숙론>이 출간되기 이전에도 ‘숙의과정’이라는 단어가 꽤 몇 년간 보였는데, 이는 결국 ’무엇‘ 이전에 ’너‘를 받아들이는 성숙한 태도며 포용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너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과정,
너를 참을성 있게, 진지하게 마주하는 것 - 세상에서 가장 먼 심장에서 두뇌로, 두뇌에서 심장으로*
결국, ’무엇‘보다는 서로를 위하는 태도, 마음이 진정 중요한 것이리라.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만 사랑할 수 있다.
…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것을 완벽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원의 철학
The Perennial Philosophy>
올더스 헉슬리(1945)의 재인용
- <숙론> 202p
*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두뇌에서 심장까지의 거리”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앎과 실행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 그들의 삶을 좋게 얘기하면 ‘참 신중하다’이지만, 좀 냉정하게 평가하면 ‘답답할 정도로 느리다’이다. - <숙론> 206p, 최재천
- 2024.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