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고

상처를 덮는 망각보다 마주하고 수리하기

by 가다은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 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 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p.17)


■ 지워버리고 싶은 장소로의 귀환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삭제(망각)하고 싶은 장소(기억) 하나쯤은 품고 살아간다. 그곳은 나를 작아지도록 만든 교실일 수도 있고,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떡볶이 집일 수도 있으며,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집일 수도 있다. 소설의 주인공 강영두에게는 바로 원서동의 ‘낙원하숙’이다.

영두는 상처 입은 장소를 통째로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온 인물이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다시 그곳으로 불러들인다. 친구 은혜의 소개에 힘입어 창경궁 대온실 수리 공사의 보고서 작성 업무를 맡게 되면서, 그는 잊기로 결심했던 낙원하숙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소설은 건물을 고치는 ‘물리적 수리’와 마음을 고치는 ‘심리적 수리’가 겹치는 패턴으로 진행된다.


■ 창경궁 대온실과 지하 배양실: 역사와 트라우마의 층위

창경궁 대온실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온실이자 일제강점기의 잔재라는 이중의 얼굴을 가진 건축물이다. 몇 차례 철거 위기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생존자’ 같은 공간이다. 영두는 대온실을 실측하고 수리하는 과정에서 도면에 나오지 않는 지하 배양실의 존재를 발견하고, 건축물 아래 숨겨진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지하 배양실이라는 밀실과 확장의 공간은 소설의 거점이 되면서 서사의 축을 형성한다. 제국주의적 야망을 품고 포도 재배에 집착했던 후쿠다 노보루, 이름과 정체성을 여러 번 바꿔야 했던 ‘마리코’의 안문자 할머니(낙원하숙 주인), 그리고 기노시타 코주(박목주), 가마야마 마사시(이창충) 등의 비극이 퇴적된 장소다. 바닥 타일을 걷어내고 흙을 파헤치는 행위는 우리가 외면해 왔던 역사의 진실과 개인의 트라우마를 동시에 드러내는 장치이다. 영두가 작성하는 수리 보고서는 행정 문서를 넘어 지워진 존재들을 되찾는 정교한 기록이자 윤리적 비망록으로 격상된다.


창경궁 대온실 전경(궁능유적본부 royal.khs.go.kr).jpg 창경궁 대온실 전경(궁능유적본부 royal.khs.go.kr)


■ 유리 손잡이와 안문자 할머니: 깨지기 쉬운 존재의 강도

영두는 낙원하숙의 목재 대문에 어울리지 않게 박혀 있던, 깨지기 쉬워 보이는 유리 손잡이를 주시하게 된다. 이는 한옥의 한국적 공간에 억지로 끼워 넣어진 서구식 오브제라는 점에서 우리 근현대사가 겪어온 정체성의 왜곡을 상징한다. 또한 영두가 대온실의 유리와 하숙집 손잡이가 같은 계열의 재료라는 ‘혈통’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개인의 불안을 넘어 안문자 할머니의 굴곡진 생애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안문자 할머니가 ‘마리코’로 살아야 했던 세월은, 언제 깨질지 몰라 위태로웠던 유리 손잡이의 존재와 정확히 겹친다. 동시에 대온실의 유리가 모진 세월을 견디며 건물을 지탱해 왔듯, 할머니 역시 시대의 폭력 속에서도 자기 존재를 버티며 살아온 또 다른 ‘대온실’이었다. 영두가 유리 손잡이의 출처를 추적해 지하 배양실을 파헤치는 일은 할머니의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고 뒤틀린 역사의 설계도를 바로잡으려는 실존적 투쟁으로 읽힌다.


■ 리사와 관계의 강도: 미워하면서도 이해해야 하는 타자

리사는 영두를 가장 아프게 하는 인물로 중학교 시절 낙원하숙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이다. 그는 영두를 위기로 몰아넣고 좌절하게 만들어 결국 고향 석모도로 귀환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다. 소설은 리사를 미워하면서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애증의 타자’로 그려낸다. 건축 용어인 ‘강도(Strength)’가 관계에 대한 사유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건축에서 강도란 파괴되기 전까지 견디는 응집력이라면, 인간관계의 강도는 누군가에게 상처받고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마음의 힘이다. 리사의 공격적인 우울과 미숙함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서 영두는 결국 “상대를 이해하는 것만이 미움을 피하는 유일한 길”임을 체득한다. 상처를 준 타자를 외면하는 대신 그와 자기 자신을 함께 수리해 나가는 길을 택한다.

리사와 영두의 관계는 한 번의 배신으로 끝나는 단선적 사건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상처가 비뚤어진 방식으로 맞닿아 벌어진 비극의 연장이다. 리사는 시험지 유출 사건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영두를 의도적으로 희생양 삼고, 이 경험은 영두에게 “사람을 믿었다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를 남긴다. 그러나 작품은 리사를 단지 ‘악한 가해자’로 고정하지 않고, 안문자 할머니와의 관계, 낙원하숙을 매각하려는 선택, 자신의 책임을 끝내 회피하는 태도 들에서 시대와 환경이 빚어낸 왜곡된 생존 방식을 비춰 넣는다. 그래서 영두가 리사를 다시 마주하는 장면은 복수나 화해의 감정으로 수렴되기보다, ‘저 아이도 결국 자신이 받은 상처를 내뱉을 줄밖에 몰랐던 존재’라는 이해로 귀결된다. 결국, 이해가 영두에게는 과거를 떠나보내기 위한 마지막 수리 공정인 셈이다.


■ 실존주의와 농담: 비극의 무게를 견디는 품위

소설을 관통하는 철학은 비극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실존주의적 태도다. 영두는 “사는 건 도로 같아서 언젠가는 유턴이 나온다”(p.66)를 곱씹으며, 과거의 상처가 현재를 규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수리’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삶의 방향을 스스로 틀어 버린다.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영두가 마주하는 공무원 ‘장 과장’은 효율과 편의를 위해 불편한 진실을 덮고자 하는 관료주의의 얼굴이다. 영두가 주석과 비망록으로 누락 된 목소리들을 끝까지 기록하려 드는 태도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지키려는 실존적 투쟁이며, “어떻게 하면 마음을 폐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작가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무거운 과정을 지탱하는 방식이 김금희 특유의 재치라는 점이다. “제가 입사하고 통모짜렐라예요, 잠을 못 자는 과노동의 신데렐라.”(p.247) 같은 유치하고도 유쾌한 농담을 여럿 포진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여유, 곧 슬픔을 농담으로 살짝 퉁치고 넘어갈 수 있는 성숙한 자아로 환원한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농담은 비참한 현실(Fact)에 완전히 함몰되지 않고, 그 너머의 자아(Being)를 회복하려는 고도의 정신적 승리의 형식이다.


■ 산아와 스미, 그리고 나만의 수리 보고서

영두의 여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존재는 바로 조카 ‘산아’와 그의 친구 ‘스미’이다. 이들은 주변 인물이 아니라, 영두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따뜻한 어른’으로 거듭나게 하는 서사적 거울로 작동한다. 스미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 영두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투영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영두는 스미에게 마음속으로 ‘벌새(허밍버드)’라는 별명을 붙여주는데, 커피콩만 한 알을 낳고도 대륙을 횡단하는 벌새의 생명력처럼, 작고 연약한 존재가 품을 수 있는 힘을 응원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곁에 균열이 나지 않은 어른은 없기에 불안하지 않은 아이도 없다(p.179)”라는 문장은, 영두가 산아의 모습 속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하며 얻은 깨달음이다.

카메라 렌즈 가까이에 있는 스미와 작은 점처럼 멀어진 산아를 한 컷에 담는 장면에서, 거리와 크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통과 희망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이들과의 관계는 수리 보고서를 행정 문서가 아닌,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려는 윤리적 비망록으로 바꾸어 놓는다. 소설의 마지막에 영두가 지하 배양실 자리에 거창한 기념비 대신 국화꽃밭을 조성하는 선택은, 진실을 한 번에 봉인된 기념물로 만들기보다 매년 피고 지는 살아 있는 생명으로 기억하겠다는 선언이다. 또한 자신을 대온실로 이끌어 삶을 수리할 기회를 준 건축회사 소장에게 글 대신 흰죽지수리 사진을 보내며, 서투르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제 영두는 리사를 만나는 일에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상처의 윤곽을 정확히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상처로부터 빠져나오는 길 또한 한층 더 안전해졌다.


■ 상처를 대하는 두 가지 문법: <아몬드>와 <대온실 수리 보고서>

손원평 작가의 소설 <아몬드>와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모두 상처 입은 인물이 타인을 이해해 가는 과정을 그리지만, 상처를 대하는 방식과 회복의 문법은 분명히 다르다. <아몬드>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 윤재의 성장과 감정 학습에 초점을 맞춘다면,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이미 감정이 과잉된 인물들이 어떻게 자신의 기억과 고통을 복구하고 재배치하는지를 보여준다. <아몬드>에서 윤재는 타인의 감정을 배우고 관계를 맺으면서 비어 있던 내면을 서서히 확장하고 채워간다. 반면 영두는 세상 밖으로 선뜻 내딛기보다 흩어진 과거의 파편들을 수집해 ‘사실의 두께’를 만들고, 기록의 과정을 통해 자기 내면의 구조를 견고하게 수리한다. 두 작품 모두 타인에 대한 이해를 핵심 가치로 삼지만, 김금희는 개인 심리를 넘어 ‘기록과 역사, 목격의 윤리’라는 더 넓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상처를 치유하는 동력에서도 차이가 뚜렷하다. 윤재에게 타인은 감정을 배우기 위한 ‘학습의 대상’이고, 그와의 접촉은 닫혀 있던 세계를 넓히는 에너지다. 영두에게 타인은 이미 내면 깊숙이 박혀 통증을 일으키는 파편들이며, 어떻게 다시 배열하고 의미를 새로 다는지가 곧 회복의 방식이 된다. 이 때문에 <아몬드>가 공감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향해 직선적으로 전진하는 성장 서사라면,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망각하고 싶던 장소와 시간으로 되돌아가 바닥을 끝까지 파헤치는 ‘회귀’의 서사로 읽힌다. 안문자 할머니를 비롯한 인물들의 역사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현재의 시점으로 불러오는 일과 겹친다.

결국 두 소설은 모두 ‘이해’라는 같은 목적지에 도달하지만, 한쪽은 감정의 온기로 한 소년의 내면을 밝히는 등불처럼 다가오고, 다른 한쪽은 기록과 역사적 목격을 통해 거대 담론과 미시적 진실을 정교하게 연결하는 설계도처럼 기능한다. 독자는 서로 다른 문법을 통해, 상처를 대하는 방식에도 성장과 복구, 확장과 재배치라는 전혀 다른 층위의 구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대온실 표지.jpg


덮어둔다고 해서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누구에게나 부지불식간에 떠오를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지하 배양실’이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영두처럼 ‘나만의 수리 보고서’를 써 내려가는 일은 그 상처 위에 새로운 시간을 덧입히는 복원 작업이 될 수 있다. 지금 사는 게 삐걱거리며 잊고 싶은 기억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면, 상처를 하나씩 적고 작은 주석을 달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보는 건 어떨까. 사는 일이 도로 위에서 유턴하는 것처럼 단번에 방향을 틀 수 있는 여정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방향을 돌릴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해’라는 이름의 수리를 어느 정도 마친 채, 이전보다 달라진 마음으로 더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벚꽃이 피는 계절에 첫 문장을 적어 보는 것만으로도 오래 잠겨 있던 마음의 문이 조금은 부드럽게 열릴지 모른다.


“한때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서늘해지던 곳이지만 이제는 많은 이들의 각자 다른 시간을 거느리고 있는, 우주에서 가장 주요한 별처럼 느껴지는 집. 나는 잎을 다 떨구고 가지를 층층이 올려 나무로서 강건함을 띠는 벚나무를 올려다보다가 가쁘게 뒤돌아 다시 섬으로 향했다.”(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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