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닫고 마음을 열 때 비로소 만나는 거인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내 인생, 이대로 괜찮은 걸까?”라는 막막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특히 ‘마흔’이라는 나이는 청춘의 화려함이 지나간 자리에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이 놓이는 시기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마음은 세상의 평가와 비교에 멍들기 일쑤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범한 위로가 아니라,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확실한 ‘정신적 기둥’이다. 피아니스트 이지영이 건네는 『마흔에 다시 만난 베토벤』은 바로 그 기둥을 세워줄 것 같은 예감을 준다. 이 책을 마주하면 문득 궁금해진다. 과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였던 베토벤의 마흔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마흔의 베토벤: 절망의 끝에서 피어난 '황제'의 기개
1770년 본에서 태어난 베토벤이 마흔 줄에 들어선 1810년 전후, 그의 육체는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20대 후반부터 시작된 청력 상실은 이제 일상적인 대화조차 불가능한 침묵의 감옥이 되었다. 사실 그는 서른두 살이던 1802년, 이미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며 죽음을 결심했던 인물이다. “내 곁에서 부는 풀피리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라며 절규하던 그는 삶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하지만 마흔의 베토벤은 달랐다. 유서를 쓰면서까지 절망했던 청년은 간데없고 오히려 교향곡 제5번 ‘운명’과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를 쏟아내며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엘리제를 위하여’도 이즈음이었다. 외부의 소음이 차단되자 비로소 내면의 선율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저자 이지영은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타인의 평가와 세상의 기준에 휘둘리느라 진짜 나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 않은지, 말이다.
■ 고통을 해석하는 나이, 마흔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은 마흔의 베토벤이 도달한 경지와 묘하게 닮지 않았는가. 젊은 날의 베토벤에게 청각장애가 된다는 사실은 숨겨야 할 치욕이자 유서의 소재였지만, 마흔의 그는 고통을 더 이상 장애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음악이라는 환희로 치환하는 법을 깨달은 상태였다.
저자는 베토벤을 박제된 위인이 아니라, 매일 아침 고민하고 사람 때문에 상처받으면서도 ‘나다운 삶’을 위해 치열하게 버텼던 한 인간으로 조명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조차 예술의 재료로 삼아 당당하게 연주했던 마흔의 거인에게서 독자는 삶의 처방전을 발견하게 된다.
■ 리추얼과 현실감: 원두 60알의 마법
이 책이 지닌 특별한 매력은 베토벤의 소소한 일상을 현대적인 ‘리추얼(Ritual)’의 관점에서 풀어낸 점에 있다.
원두 60알: 매일 아침 정확히 원두 60알을 세어 커피를 내리던 베토벤의 습관은 무기력한 일상을 지탱하는 작은 규칙의 힘을 보여준다.
가계부를 쓰는 예술가: 꼼꼼하게 지출을 기록하던 그의 모습은 예술적 영감만큼이나 현실적 책임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산책하는 철학자: “모든 나무가 나에게 말을 건다.”라던 그의 산책 습관은 지친 중년의 영혼을 치유하는 가장 단순하고도 강력한 방법임을 제시한다.
■ 나만의 교향곡을 지휘하기 위하여
40년 동안 건반 위에서 베토벤과 대화하고 15년간 명상을 이어온 저자의 문장은 깊고 따뜻하다. 클래식이라는 엄숙한 벽을 허물고 베토벤의 음악에 우리네 삶의 노랫말을 붙여놓은 듯한 전개는 문턱을 낮춰준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이면, 누구라도 베토벤처럼 당당하게 “내 운명의 목덜미를 움켜쥐겠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얻게 된다. 남들이 정해놓은 악보대로 연주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직접 작곡하고 지휘하는 나만의 인생 교향곡을 시작할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상상해 보는 풍경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스피커에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 2악장이 잔잔하게 흐른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옆에 두고 책을 펼치면, 200년 전의 베토벤이 옆자리에 앉아 내 어깨를 다독이며 이렇게 말해줄 것 같다.
“괜찮아, 고통은 음악이 되고 시련은 너를 더 단단하게 만들 거야. 너만의 60알을 세며 오늘 하루를 시작해 봐.”
책은 이렇듯 지식을 채우는 독서가 아니라 멍든 마음을 연고로 바르는 치유의 시간이 되어주리라는 기대. 베토벤의 위대함을 찬양하기보다 그 위대함 속에 숨겨진 인간적인 아픔과 노력을 발견하며 우리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이지영의 『마흔에 다시 만난 베토벤』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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