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2026 해피 뉴 오페라:벨칸토 갈라

아포리즘으로 오마카세를 즐기다

by 가다은

(1월 31일 롯데콘서트홀)


이번 겨울 가장 추운 날의 하루였지만, 따뜻하고 화사한 로비에 들어서니 기분 좋은 설렘이 밀려왔다. 사실 ‘오페라’ 하면 왠지 격식을 갖춰 입고 정자세로 앉아 긴 시간을 견뎌야 할 것 같은 막연한 거리감을 느낄 사람이 많겠지만, 오늘 선택한 <2026 해피 뉴 오페라 : 벨칸토 갈라>는 그런 부담감을 덜어, 누구나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반가운 초대장이다. 오페라 전체를 다 보는 것이 한 편의 장편 소설을 읽는 고단한 과정이라면, 갈라는 그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문장들만 추려낸 ‘아포리즘’이었다.


올해의 첫 달을 매듭짓는 금요일 밤, 롯데콘서트홀에서 맛보는 호흡은 벨칸토의 찬연한 선율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공연은 성악의 향연을 넘어, 인간이 목소리로 빚어낼 수 있는 가장 낙천적이고도 진실한 위로가 무엇인지 증명할 무대였다. 로시니와 도니제티, 이탈리아 오페라의 두 거장의 유산이 한 무대에서 교차할 때, 객석은 시대를 초월한 생명력에 압도당하리라.



무대의 서막을 연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는 벨칸토 오페라가 지닌 기교의 정점이자, 동시에 전복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작품이다. 18세기 프랑스 혁명 전야의 공기를 품고 태어난 이 희극은 신분이라는 단단한 벽을 기지와 유머로 허문다. 지휘자 김광현의 세밀한 리드 아래 흐르는 서곡은 청중의 심박수를 단숨에 끌어 올렸다. 바리톤 김기훈과 조병익이 보여준 피가로의 기질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졌다. 세상의 질서가 권위와 혈통에 의해 좌우되던 시절, 오로지 자신의 재능과 낙천성으로 운명을 개척한 피가로의 모습은 오늘날 정답 없는 혼란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주인은 결국 나’라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주지 않던가.


이러한 로시니의 화려하고 지적인 위트는 2부에서 도니제티 <사랑의 묘약>이 지닌 서정적인 순수함과 만나 입체적인 감동으로 완성된다. 도니제티의 음악은 로시니보다 한층 더 인간의 내밀한 감정에 밀착해 있다. 짝사랑에 가슴 졸이는 네모리노의 순박함은 테너 박승주와 이현재의 미성을 통해 투명하게 형상화되었다. 아디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가짜 묘약에 전 재산을 거는 그 무모함은, 효율과 계산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오히려 가장 고귀한 가치가 무엇인지 묻는다. 특히 사무엘 윤의 베이스 바리톤이 들려주는 약장수 둘카마라의 능청스러움은 극의 활기를 불어넣으며, 인간사 모든 비극이 한 끗 차이로 희극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번 갈라 콘서트의 묘미는 이 두 작품이 지닌 ‘시대적 유의미성’이 현시대의 결핍과 맞닿아 있다는 지점에 있었다. 로시니가 말하는 ‘자유로운 개척 정신‘과 도니제티가 노래하는 ‘지고지순한 진심’은 각기 다른 색깔이지만, 결국 인간 존엄에 대한 긍정이라는 하나의 뿌리를 공유한다. 소프라노 이수연의 화려한 콜로라투라 선율이 천장 높은 빈야드 홀을 가로지를 때, 관객들은 각자가 처한 현실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소리가 주는 순수한 쾌락에 몸을 맡겼다. 그것은 가짜 묘약이 주는 일시적인 환각이 아니라, 예술이 건네는 가장 확실한 치유의 경험이었다.


공연을 관람하며 느낀 가장 큰 유의미성은 ‘위로’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삭막하고 치열하지만, 적어도 이 공연장 안에서만큼은 네모리노의 순수함에 미소 짓고, 피가로의 기지에 박수를 보내며 근심을 잊을 수 있었다. 선곡된 아리아들은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을 넘어, 각박한 현실을 버티게 하는 정서적인 비타민이었다.


갈라 콘서트라는 형식이 갖는 차별성도 뚜렷했다. 오리지널 공연이 주는 본연의 아우라 감동도 좋지만, 이렇게 하이라이트만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방식은 오페라 입문자들에게는 친절한 안내서가 되고, 애호가들에게는 최고급 디저트가 아닐까. 마치 이름난 맛집의 시그니처 메뉴만을 모아놓은 오마카세를 즐기는 기분이랄까.


1부에서 ‘나는 이 거리의 만물박사’ 전주가 나오면 객석 한가운데 앉아있던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난다.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통로를 가로지르는 피가로의 모습은 극 중 ‘해결사’로서의 당당함과 유머를 단번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2부에서는 떠돌이 약장수 둘카마라가 객석 사이를 누비며 ‘이 약 한 병이면 사랑도 병도 다 고친다’라며 관객들에게 가짜 약(사탕?)을 나눠주며 유혹하는 장면이 또한 재미를 더했다.


마지막은 여섯 성악가의 떼창 오페라로 장엄하게 정식 공연의 막을 내렸다. 이어진 앵콜, 김광현 지휘자의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그는 포디움을 벗어나 익살스러운 이야기꾼이 되었다. 관객은 웃음을 강요받지 않은 채 자연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연초의 이 무대는 예술이 삶으로 번져가는 신호탄이자 축배이며, 새로운 시간을 향한 출정식이 아니었을까.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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