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꿈. 이룰 수 없어도,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by 김세원

2012년 이 뮤지컬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설렘과 가슴 벅찬 느낌을 아직 잊을 수 없다. 주위에 살아있는 멘토도, 소유할 수 있는 책도 아닌 그저 몇 년에 한번 공연이 돌아올 때에만 경험할 수 있는 뮤지컬일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창 방황하던 시점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 작품이라 내게는 매우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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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을 보러 가는 길은 어렸을 적 롯데월드에 가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롯데월드 입구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느껴지는 새로운 세계로의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 디큐브 아트센터에서도 똑같이 느껴졌다. 뮤지컬을 본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가장 좋은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에 한 글자도 적지 못하다가 꾸역꾸역 글을 써보기로 한다. 그러나 아마 이 글은 내 마음에 들지 못할 거라 확신한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와 원작 소설 <돈키호테>는 내용은 같지만 다른 지향점이 있다. 특히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극 중 등장함으로 인해 더욱 입체적인 뮤지컬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뮤지컬 속 돈키호테라는 인물은 작가인 세르반테스가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돈키호테와 그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반대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나를 더 마음 쓰게 했다. 돈키호테는 어떤 장애물이 자기 앞에 와도 그것을 극복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정작 돈키호테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세르반테스는 그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고 주저한다. 처음에는 지하감옥에서 누구보다 당당해 보였던 그가 재판을 받으러 가기 전에 두려워하는 것. 그러나 자신이 용기를 주었던 사람들에게 반대로 용기를 얻은 채 재판을 받으러 올라가는 모습은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맨 오브 라만차의 오버츄어*는 주요 넘버들을 요약해서 메들리처럼 풀어내는 곡이라 뮤지컬을 두 번 이상 본 사람들에게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공연이 시작하기 전 한 번의 공연을 미리 본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맨 오브 라만차의 오케스트라는 항상 수준급이다. 그들의 연주는 공연을 더욱 아름답게 하지 공연에 흠집을 내는 일은 거의 없다.

(*오버츄어 Overture : 막이 본격적으로 올라가기 전에 오케스트라가 하는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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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돈키호테 역의 류정한은 10년 전 초연 때 돈키호테를 맡았다. 자신도 이 작품이 다른 작품에 비해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말한 적 있다. 그런 의미에서 류정한이 연기하는 돈키호테는 '멋지다'. 돈키호테가 둘시네아를 부를 때 그 사랑하는 마음만은 청년의 순정 이상이다. 돈키호테의 늙고 초라한 몸과 광기에 가까운 정신마저 둘시네아를 향한 그의 순수함을 더럽힐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 공연에서 눈에 뜨인 것은 산초(정상훈)였다. 1막에서의 산초는 텔레비전 속 ‘양꼬치 앤 칭다오’를 말하는 개그맨처럼 한없이 웃긴다면, 2막에서의 정상훈 산초는 돈키호테를 아끼고 사랑하는 산초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다. ‘좋으니까’ 넘버를 부르는 정상훈 산초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행동이나 눈빛을 보며 산초는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돈키호테가 좋기 때문에 그를 따라다니는 구나 하고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돈키호테가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다른 이들의 공분을 사서 함께 맞아야 할 때에도, 또 돈키호테가 집시들에게 홀려 돈이고 귀중품을 전부 뺏길 때에도 그는 돈키호테를 걱정하지만 비난은 하지 않는다. 산초는 돈키호테가 가려고 하는 길이 어디든 함부로 막지 않는다. 그가 돈키호테를 막을 때에는, 돈키호테임을 포기하고 모든 걸 체념한 체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는 정신마저 늙어버린 할아버지이다. 산초라는 역할은 단순히 돈키호테 옆에 있는 조연이 아니라, 그가 있기에 돈키호테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캐릭터인 것이다.


둘시네아 역은 예전 천상지희에 있던 린아가 맡았는데, 이전에서의 둘시네아와 조금 다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원작 소설에서는 그는 둘시네아를 만나기 전부터 둘시네아라는 존재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사란 모름지기 목숨을 바쳐 싸울 만큼 사랑하는 레이디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봤던 둘시네아는 세상의 풍파에 닳고 닳아있었던 여자로 표현되었다. 그녀는 ‘남자란 다 똑같아’하면서 믿지 않다가 돈키호테의 순수한 마음에 끌려 결국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여자가 아닌 진정 둘시네아라고 믿게 된다. 그 과정은 참혹하다고 할 만큼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 더욱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린아의 둘시네아는 어린 만큼 남자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혼란스러워하던 여자가, 돈키호테를 통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여성으로 연기하였다.


어떤 배우가 어떤 것을 마음에 두고 연기와 노래를 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뮤지컬인데도 관객에게 완전히 다른 극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돈키호테는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기사가 될 수 있음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고, 기사라는 명예에 걸맞은 삶을 살기 위해서 위험에 빠진 사람을 위해 언제든지 목숨을 바치곤 한다. 사회를 살면서 과정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맨 오브 라만차를 보고 나온 사람이 세상을 향해 ‘난 안될 거야. 다른 사람들이 너무 잘하잖아.’라며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무엇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그 무엇이 되기 위해 나를 믿으며 살아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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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돈키호테의 한마디에 잊어버릴까 봐 인터미션 때 급하게 휴대폰에 적어 내린 그의 대사는 아직 내 휴대폰 속에 남아있다.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되어질 모습을 연모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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