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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Sep 29. 2021

용서는 광고판보다 크다

영화 <쓰리빌보드>

나폴레옹의 사전에 불가능이 없듯, 내 사전에 용서란 없었다.

누구든 한번이라도 내 기준의 임계치를 넘어버리면

내가 만들어놓은 바운더리에서 가차없이 쫓아냈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듯,

저 멀리 달아나는 것.

나는 그것이 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윌러비 경찰서장을 향한 

밀드레드의 분노는 강렬하다.

큰돈을 주고 직접 산 커다란 세개의 광고판에 적힌 문구는 세 문장이 채 되지 않는다.


“raped while dying”
“and still no arrests?”
 “how come, chief willoughby?”


밀드레드의 분노 역시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내 딸이 죽었는데, 경찰서장은 여전히 멀쩡히 살아있다. 게다가 존경까지 받으면서.

심지어 딸이 강간당해 죽었는데 범인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누군가를 응당 증오하는 것을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누군가를 미워할 수 밖에 없을만큼 그 슬픔이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슬픔이지 분노가 아니다.

문제는 윌러비 서장이 자살을 하면서 시작된다.

윌러비는 병든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그 어떤 방법으로도

밀드레드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밀드레드에 대한 적개심이나 복수심의 발로가 아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광고판에 들어가는 비용을 밀드레드에게 남겨준다.

밀드레드의 분노에 공감하고, 그가 진짜 강간범을 찾기를 응원한 것이다.


윌러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것은 밀드레드 뿐이 아니었다.

자신을 유일하게 인간으로 대접해주던 서장이 자살하자,

딕슨은 밀드레드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리고 그런 딕슨과 밀드레드의 분노에는 공통점이 있다.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분노를 화살이 이상한 곳에 꽂혀버린 것.

윌러비 서장이 밀드레드의 딸을 죽인 것이 아니듯,

밀드레드가 윌러비를 죽인 것은 아니다.


그 후의 서로에 대한 둘의 분노는 가히 폭력적이다.

집 안의 모든 것-사람을 포함하여-을 망가뜨리고, 얼굴마저도 엉망이 된다.

이렇듯 영화의 흐름이 줄곧 분노와 복수로만 이어져오다 '용서'로 방향을 선회하는 것은

주인공인 둘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이다.

딕슨의 분노는 밀드레드 뿐 아니라, 광고판을 만들어준 웰비에게까지 뻗친다.

딕슨은 웰비를 찾아가 정말... 죽지 않을만큼 때린다.

얼마 후, 분노의 향연으로 딕슨이 웰비의 병원 옆 자리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웰비는 딕슨에게 울먹이며 분노를 쏟아낸다.

그리고 금방 딕슨에게 오렌지주스를 권한다.

웰비의 분노는 정당하다.

자신을 죽도록 팬 사람은 다름아닌 딕슨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웰비는 밀드레드를 용서한다.

웰비는 딕슨의 폭력 안에 숨겨져있던 슬픔에 공감하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밀드레드와 딕슨은 연대하여

자신들의 진짜 분노의 상대인 딸의 강간살해범을 찾아나선다.

마침표대신 쉼표를 찍은 이 영화의 끝은 처음과 다르게 잔잔하고 희망적이기까지 하다.


웰비의 오렌지주스와 윌러비 서장이 남긴 봉투가

아마도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분노에 대처하는 법일 것이다.

분노는 아무리 표출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시뻘건 광고판이 활활 타버릴때까지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처럼.

하지만 용서는 광고판을 넘어서 진짜를 찾아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마다 <쓰리 빌보드>의 웰비를 떠올리지만,

아직 나는 흠씬 두들겨 맞고도 금방 오렌지 주스를 건넬 자신은 없다.


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자주 떠올린다.

분노엔 내가 못한 일들에 대한 자기혐오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내가 살면서 바운더리 밖으로 쫓아낸 사람들을 향한 분노에도

분명히 그들의 행동에 응당 대처하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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