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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비축기지 Sep 19. 2023

손으로 떠나는기지 여행기

고요한 감각을 깨우는 문화비축기지

시각장애인을 위한 ‘손으로 보는 건축 투어’는 2022년 시범 운영을 마치고 올 가을에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인데, 정식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전 미리 방문해 살짝 엿보고 왔다.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어느 날, 시각장애인 원희승 씨와 함께 문화비축기지를 방문했다.



투어 코스의 시작은

안내동
문화비축기지 건립 역사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투어가 시작됐다. 내리쬐는 햇빛을 피해 안내동 그늘 아래로 가, 간략한 설명을 듣고 본격적인 촉각 투어가 이루어졌다. 첫 코스는 문화비축기지의 공간 구성을 알 수 있는 건축 모형을 만지는 것이었다. 해설사는 원희승 씨의 손을 이끌어 모형 곳곳을 꼼꼼하게 만질 수 있게 도왔다. 안내동은 석유비축기지 시절 관리 사무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당시 벽돌을 쌓아 만드는 조적식 건물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같은 방식으로 만들었다. 이현옥 해설사가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원희승 씨의 손을 벽으로 이끌었다. “높이 5cm, 길이 18cm의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어요. 아래쪽을 만져보면 다른 재료가 매끈하게 덮인 게 느껴질 거예요. 외벽을 콘크리트로 보강하기도 했답니다.” 그는 손끝으로 벽을 매만지며 해설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안내동 양쪽으로는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는데 오른쪽에는 매봉산에 이르는 산책로가 있다. “경사진 턱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해설사의 다정한 멘트와 함께 왼쪽 잔디밭을 가로질러 문화마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40년 세월의 흔적을 느끼는
문화마당

문화비축기지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문화마당에서는 대규모 축제나 행사, 플리마켓 등이 열린다. 석유비축기지 시절 석유를 가득 실어 무거운 탱크로리 차량이 이곳을 빈번하게 드나들었는데, 바닥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콘크리트를 30cm 깊이로 조성했다. 공원으로 새롭게 단장하는 과정에서 예전 콘크리트를 다시 파내면 산업 폐기물이 너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훼손된 부분만 정비하고 다른 부분은 그대로 두었다. “바닥 마감이 다른 것이 느껴지나요? 40년 세월의 흔적이 콘크리트 바닥에 오롯이 남아 있죠. 울퉁불퉁한 바닥을 느끼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
소화액저장실

“10m 앞쪽에 차량 방지턱과 볼라드 6개가 놓여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시각장애인을 위해 꼼꼼히 주변 상황을 알리며 투어가 이어졌다. 소화액저장실로 들어서자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물탱크를 가로로 눕힌 소화액 탱크는 8,000L 용량으로 석유비축기지에 불이 나면 이곳의 소화액을 사용해 진화했다고 한다.




한 줄기 햇살이 비쳐 드는
T4

문화비축기지를 재생할 때 마감재를 따로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하는 공법을 사용했다. 보통 콘크리트는 굳기 전에 원하는 형태의 거푸집에 넣어 구조물을 짜는데 T4에는 여러 질감을 살린 노출 콘크리트를 만날 수 있다. 나뭇결 모양을 낸 송판 노출 콘크리트, 종이가 감고 올라간 형태로 휴지심과 비슷하게 생긴 종이 노출 콘크리트 등이다. T4는 등유를 비축했던 공간으로 탱크 내부의 어둠과 옹벽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활용하는데 출입구를 만들기 위해 탱크 철판과 콘크리트 일정 부분을 잘라냈다. 잘라낸 부분이 드러나 그 두께를 손으로 만지며 느낄 수 있다. 층고가 높은 탱크 안으로 들어서자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원희승 씨는 안내견과 함께 탱크를 크게 한 바퀴 둘러보며 더위를 식혔다(탱크 내부는 에어컨을 가동해 시원했다). 어두운 여기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와 밝히는 곳이 있는데 이는 과거 작업자들이 기름량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탱크 옥상에 작은 구멍을 내놓았기 때문이라고. 해설사와 원희승 씨는 비쳐 드는 빛 아래 공간에 대한 설명과 소감을 나누며 대화를 이어갔다.






어둠을 지나 밝은 빛으로
T1

이날의 마지막 코스는 유리 전시관의 T1. 전시관으로 향하는 문화 통로는 전시가 없을 때는 조명을 꺼둔다. 과거 흙으로 덮여 있던 곳으로 깜깜한 땅속을 지나 유리 파빌리온의 밝은 빛을 만나는 건축적 경험을 의도했다. 문화 통로는 기울어진 벽으로 공간을 나누었는데, 벽에 지름이 4cm인 구멍이 여러 개 있다. 노출 콘크리트 기법 중 하나인 ‘콘 노출’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통로를 지나면 밝은 유리 파빌리온에 도달한다. 너비 2.5m, 높이 11m의 유리 12장과 양옆 환기창으로 구성돼 있다. 12장의 유리는 ‘리브’라는 4겹의 유리가 지탱하고 있고 천장까지 유리로 마감했다. 천창과 벽체가 붙어 있지 않고 10c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별도의 냉난방 시설이 없어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지만 유리창 너머의 자연 풍광은 그 어디서도 즐길 수 없다.








“마포 점자 도서실에서 근무하며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는 원희승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기지’라는 단어와 탱크가 있다는 이야기에 군사 시설이나 전쟁 기념관 같은 곳인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너른 공원일 줄은 몰랐어요. 우선 전시하지 않는 부분까지 시각장애인을 위해 상세히 설명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탱크가 잘린 단면 같은 곳은 지나치기 쉬운데 직접 만져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어요. T4 공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소리가 많이 울리잖아요. 제가 트롬본을 전공했거든요. 그곳에서 음악을 연주하면 어떤 소리가 날지 궁금해요. 또 안내견과 함께 이동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점도 좋았고요. 주위의 시각장애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투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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