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이제 ‘특권’ 대신 ‘공정’을 택하다
“신세계백화점 할인됩니까?”
DJ 박명수의 농담 섞인 질문에 올데프(올데이프로젝트) 애니의 답은 단호했다.
“아뇨, 안 됩니다.”
짧은 이 문답은 지금 한국 사회가 재벌을 바라보는 새로운 기준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제 대중은 재벌에게 ‘특별한 배려’를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당신들도 우리와 같은 규칙 안에서 살고 있는가?”
왕 없는 나라의 상징은 어떻게 바뀌었나
영국이나 일본에는 왕실이 있다. 왕은 존재 자체로 셀럽이고, 국가의 상징이다.
반면 왕이 없는 한국에서 이 정서적 자리를 대신해온 존재는 오랫동안 재벌이었다. 고도 성장의 주역이자 부와 권력의 은유. 그들은 늘 선망과 불신을 동시에 받는 이중적 존재였다.
과거의 재벌이 규칙 위에 서 있는 ‘구름 위의 존재’였다면, 3·4세대로 접어든 오늘의 재벌가가 선택한 생존 전략은 의외로 단순하다. 특별해지지 않으려는 선택, 다시 말해 시민으로 내려오는 전략이다.
결과보다 ‘설명 가능한 과정’
최근 대중의 시선은 재벌가 자녀들이 무엇을 이루었는지보다, 어떻게 그 자리에 도달했는지에 머문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설명 가능한가가 핵심이다.
이재용 회장의 아들은 해군 소위로 임관하며 병역이라는 국민적 의무를 정면으로 수행했다. 이재용 회장 스스로도 치맥을 하거나 저렴한 립밤을 바르거나 핫팩을 사용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인기가 수직 상승 중이다.
동생인 호텔신라 이부진 사장의 아들은 대치동 일반 학원과 휘문고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영역인 ‘교육’의 룰 안에서 편법 없이 성취를 증명한 사례다.
이제 혈통은 보호막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가혹한 검증의 출발선이 된다. 대중은 더 이상 “누구의 자녀인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어떤 룰로 경쟁했는가”를 묻는다.
MZ세대가 바꾼 ‘존중’의 기준
MZ세대는 높은 사회적 지위 자체를 혐오하지 않는다. 그들이 참지 못하는 것은 불공정한 새치기와 설명되지 않는 꼼수다.
앞서 이야기한 올데프 애니, 신세계 회장의 딸이 글로벌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해 실력으로 평가받는 과정이 긍정적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본의 힘으로 자리를 사는 대신, 대중의 냉정한 평가라는 룰 앞에 스스로를 세웠기 때문이다. 공정한 규칙, 공개된 과정, 설명 가능한 결과. 이 세 가지가 갖춰질 때,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오히려 존중은 더 커진다.
왕처럼 군림하지 않는다는 선택
“아뇨, 할인 안 됩니다.”
1초만에 답한 이 말은 농담의 종결이 아니다. 재벌이든 아이돌이든, 누구든 룰 앞에서는 동일하다는 선언이다. 왕이 없는 나라에서 재벌이 다시 존중받기 시작한 이유는 역설적이다. 그들이 왕처럼 군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왕보다 더 엄격하게 규칙을 지키는 시민의 자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특권이라는 낡은 옷을 벗고 공정이라는 새 기준을 입은 ‘뉴 재벌’. 대중은 지금 그들의 부가 아니라, 그들의 태도를 정확히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