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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쿰파니스 Jun 29. 2024

영산강이 낳고 키운 한양 아래 작은 서울, 나주

전남 나주시에서 하루 동안

비가 내린다. 습기 가득한 공기가 먼지 내음 싣고 창문을 넘는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국수 가락 같은 빗줄기가 하염없다. 묶은 때가 씻기듯 시원스럽다. 그런데 어떡하지. 

    

나주에 가기로 했었지. 비 위로 비가 내리는 풍경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빗속의 남자가 될 용기가 선뜻 나지 않는다.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커피를 내렸다. 커피가 식어가도록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돌아가신 어머니 부고라도 다시 띄울까. 화순부터 동행하는 최순희, 나주에서 합류하는 양성숙, 두 분의 전남문화관광해설사가 아른거린다.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경주를 자주 찾았었다. 언제나 낯설었다. 첨성대, 불국사, 고분 등 마주치는 것은 특별한 감동이 없었다. 허상뿐, 돌아서는 발길은 답답하기만 했다. 고민하고, 공부했다. 숱한 발걸음 끝에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나정(蘿井)을 출발점으로 다시 시작했다. 경주가 함초롬히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상쾌함, 짜릿함이란. 그렇게 여행이 내게로 왔다. 

     

이태 전 귀촌했다. 서울로 부산으로 돌면서 전라도 태생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향으로 와서 제일 먼저 세운 계획이 전남 여행이었는지도 모른다. 2년 여를 서랍에 넣어두었던 먼지 자욱한 지도를 꺼냈다. 22개 시군 중 출발점을 어디로 할 것인지 한동안 망설였다. 최순희 전남문화관광해설사가 나주를 추천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도의 천년 고도’라는 것이다. 하긴, 전라도라는 지명도 호남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던 전주와 나주의 앞 글자를 따왔으니. 여행길에 동행해 주었다. ‘나주에서 하루 동안’이 그렇게 정해졌다.  

    

나주는 자주 다녀왔었다. 같은 생활권이고 동일 선거구이다 보니 갈 일이 많아서다. 마치 옆 동네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그런데도 나주가 이런 고장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넓고 오래된 고을이어서 그랬을까.  

    

6월 22일 토요일, 비는 멈출 줄 몰랐다. 빗줄기는 이제 칼국수 면발 같이 굵어졌다. 약속 장소를 바꾸었다. 금성관 앞 2층 카페로. 오래전 비가 많이 내리던 날, 춘천에 갔었다. 마냥 물이 그리워서였다. 공지천에 있는 ‘에디오피아의 집’에서 비에 젖은 호수를 보며 하루를 보냈다. 그때 예가체프를 처음 만났었다. 오늘도 예가체프다. 양 해설사가 빗물 흐르는 창가에서 그때 그 커피향으로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는 영산강 물결처럼 잔잔했고, 미소는 찬물에 방금 씻고 나온 아이처럼 싱그러웠다. 박물관 근무의 이력이 실감났다. 역사와 문화에 해박했다.

목사 내아 마루에서 ‘빗멍’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는 수다를 떨었고, 커피를 마셨고, 비를 구경했다. 창밖에서 금성관이 비에 젖고 있었다. 물었다. 나주에서 딱 하루가 주어졌을 때,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어야 하느냐고.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주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영산강이 아닐까 싶어요. 전라도 역사가 시작되고 퍼져 나간 곳이 나주라고 보면 됩니다. 고대 문화의 중심지나 천년 목사 고을 모두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산강이 나옵니다. 마한의 역사도, 후백제의 견훤도, 고려의 왕건도, 근원은 영산강이 아닐까요.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나주는 한양과 닮았다고 하면서 소경(小京)이라 하였지요.  ‘한양 아래 작은 서울’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영산강에 의지한 나주 지형이 한양을 쏙 빼닮았답니다.

     

지금 나주시는 1읍 19개 동‧면이에요. 예전엔 훨씬 넓었어요. 영산강 물줄기가 모두 나주였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곡동도, 영암군 금정면도 다 나주땅이었어요. 흑산도도 나주목에서 관할이었고. 조선시대 때 그곳 유배자들을 잘 관리하지 못해 나주 목사가 인사 고과에서 불이익을 당해 삭탈관직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바닷물이 영산포까지 들어왔어요. 흑산도 사람들이 여기 와서 살았으니, 영산포 홍어는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금성관과 목사 내아를 둘러보고 나주 곰탕을 먹은 후 반남면으로 가면 좋을 듯합니다. 국립나주박물관이 그곳에 있거든요. 그리곤 느러지 전망대로 가지요. 느러지전망대에서 보는 영산강이 장관이랍니다.” 

     

카페를 나섰다. 금성관(錦城館) 담장을 따라 걸었다. 담장 밖에서 건너다보는 것보다는 창밖으로 내려보는 풍경이 더 좋았다. 담장 안 너른 잔디밭이 나주 객사(客舍) 터다. 객사는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며, 외국 사신이나 중앙 관리가 사용하던 숙소였다. 요즘으로 치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라고나 할까. 너른 잔디밭이 그 규모가 작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객사 중심 건물인 금성관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셨다. 이곳에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객사가 없어졌다. 금성관은 나주군청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보물 2037호다. 


비는 지치지도 않고 줄기차게 내렸다. 금성관 옆 목사 내아로 갔다. 나주 목사 사택이다. 커다란 팽나무가 있는 집이다.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모습으로 마루에 앉았다. 낙숫물 소리가 모내기 철 개구리 울음소리 같다. ‘빗멍’ 틈새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빗소리에 담겨 떨어지며 동심원을 그린다.  

    

“저기 팽나무가요. 음, 대충 정확하게 500살 정도됩니다. 1980년 태풍 때 벼락을 맞아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을, 시민들이 소생시켰습니다. 다시 살아나서 영험한 기운으로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니, 한 번 빌어보세요.     

이곳에선 숙박도 가능해요. 일반 고택과 다른 느낌이 날 겁니다. 목사가 된 기분이랄까요. 15만 원, 12만 원, 5만 원으로 다양합니다. 061-332-6565. 요기로 전화하시면 됩니다.”  

   

나주곰탕. 본향의 품격이랄까. 맑은 국물에 향이 깊었다.

금성관 바로 앞이 나주곰탕거리다. 가게마다 길게 줄이 늘어섰다. 대열에 동참했다. 양 해설사 설명과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판소리 공연 같았다.

      

“일제강점기 때 나주에 소고기 통조림 공장이 있었어요. 살코기는 통조림으로 만들어 군수물자로 실어 갔죠. 남은 부산물로 만든 게 장터국밥이었습니다. 나주곰탕의 시작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 오일장터였던 곳이 곰탕거리로 바뀌었어요. 소의 부산물을 쓰던 것에서 양지하고 사태 머리를 푹 고아서 만든 지금의 나주곰탕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주의 3대 음식하면 나주곰탕, 영산포 홍어, 구진포 장어를 꼽습니다. 저는 웅어도 넣고 싶어요. 바닷물고기인데 봄에 알을 낳기 위해서 이렇게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요. 갈대에다가 알을 낳고 죽는데 봄철에 그걸 잡아다가 회무침을 하지요. 가을이 전어라면 봄에는 웅어에요. 내년 봄에 꼭 오세요. 봄이에요.”   


곰탕의 본향에서 먹는 맛은 달랐다. 맑은 국물에서 이리도 깊은 향이라니. 입안에 오래 머물렀다. 입가심으로 근처에 있는 나주 명물이라는 사라다빵을 탐내었지만, 기나긴 줄 앞에서 뒤돌아섰다.  

     

국립나주박물관 독널과 영상

반남면 고분 가는 길. 강을 건넜다. 멀리 황포 돛배가 강변에서 한가롭다. 영산포 홍어 거리를 지나 남으로 향했다. 가도 가도 너른 들판이다. 논이 끝없이 이어진다. 

    

“넉넉해 보이지요. 저는 이것이 나주라고 생각해요. 먹을 것이 참 많습니다. 들뿐 아니에요. 영산강의 어팔진미, 그러니까 8가지 대표적인 물고기가 있고요. 밭에서 나온 ‘소팔 진미’라고 해서 여덟 가지 채소가 있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요. 반남 고분에서 무기류가 많이 안 나오는 이유가 이거라고 생각해요. 이 지역에 살았던 토착민들은 굳이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요. 남은 것을 뺏지 않더라도 주위에 더 풍부한 것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차창 밖으로 고분들이 스친다. 경주와 달랐다. 부여나 공주의 그것과도 같지 않았다. 평평한 대지에 둥그렇게 봉긋 솟았다. 대지의 여신이 누워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손으로 만지듯 팔을 내밀어 보았다. 


독널. 웅크리고 옆으로 누운 것 같다.

고분문화실로 갔다. 고분에서 출토된 ‘독널’이 전시된 공간이다. 국사 시간에 옹관묘라고 배웠었던.

      

“영산강 유역에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고분 문화가 자리를 잡았지요. 고대 영산강 유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봉분을 크게 만들고 마치 지금의 아파트처럼 여러 개의 관을 함께 묻었습니다. 한 봉분에 묻힌 사람들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로 보입니다. 무덤에 흙으로 만든 독널을 사용했습니다. 독널이라는 건 커다란 항아리 두 개를 붙인 관입니다.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되지요.” 

    

내가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다. 이 거대한 토기, 아니 유약을 바르지 않은 옹기가 공룡알 같은 모습으로 가득하다. 독널 숲이다. 그 뒤 벽면에 '영원한 안식'이라는 아트 영상이 펼쳐진다. 연기가 피어올라 사람이 춤을 추는 모양이 나온다. 아무래도 제목을 잘못 붙인 것 같다. 궁금하다는 이유 하나로 편안한 휴식처를 파헤쳤다. 그리고 까발려 놓았다. 영원한 안식처를 잃어버린 영혼의 몸부림이 저러할까. ‘영원한 방랑’이나 ‘영혼의 한’이 더 어울릴 듯하다.   

       

느러지. 한반도 지형

마지막 여정이다. 영산강 구경에 나섰다. 네이게이션이 ‘느러지 전망대’로 안내했다. 느러지는 무안군 몽탄면 땅이다. 전망대는 나주시 동강면에 있고. 나주 땅에서 무안 땅을 넘어다보는 형국이다. 주인인 무안에서는 ‘늘어지’라고 부른다. 

    

나주를 관통하는 물길은 영산강이다. 담양 용추봉 가마골에서 발원하여 광주와 나주, 영암을 거쳐 목포로 흐르는 호남의 젖줄이다. 목포 하구언으로 흘러나가기 전, 나주평야를 지날 때 유속이 느려진다. 위에서 힘겹게 껴안고 온 흙 ‧모래를 내려 놓았다. 땅이 길에 늘어진 모양인 ‘느러지’ 지형을 만들었다.   


전망대 오르는 길 초입에서 차량 통행을 막는다. 주차장이 좁아 노약자 탑승 차량만 진입 가능하다고 한다. 호흡이 가쁘지 않을 완만한 경사길이다. 6월 중순에서 7월이면 수국이 제철이다. 시멘트 포장 양옆으로 수국이 가득했다. 화사하다. 자귀나무 꽃향기는 간지럽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더했다. 빗줄기는 함흥냉면 면발처럼 가늘어졌다. 

     

전망대에 섰다. 영산강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한의 ‘황금백수’라는 무협지에 아주 멋진 게 있었다. 도도한 듯 고고하고, 고고한 듯 청초하고, 청초한 듯 강인하고, 강인한 듯 부드럽고, 부드러운 듯 차갑고, 차가운 듯 순박하고, 순박한 듯 요염하고, 요염한 듯 지적이고, 지적인 듯... 아름답다.   


우에서 좌로 돌고 돌고 돌며 흐른다. 아니, 거대한 호수다. 느러지가 어찌 저리 한반도 지형을 닮았을까. 그것도 남한 땅만. 서울에 해당한 곳에 ‘늘어지마을’이 자리했다. 전라도 쪽은 낮게 농토였고, 경상도 쪽은 높게 나무 무성한 언덕이었다.    

 

“비 오는 풍경도 좋네요. 저녁노을이 내려오면 그야말로 장관이지요.”     


돌아오는 길은 영산강변도로를 택했다. 나주시에서 출발하여 목포에 있는 전남도청을 연결하는 강변도로다, 지금은 무안 몽탄에서 끝난다. 몽탄대교를 건넜다. 나주시로 방향을 잡았다. 우측으로 강이 흐른다. 무안이 물러서고, 함평이 지난다.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나주시입니다.’     


비는 그쳤고, 날은 저물었다. 이제는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나주는 오래되고 넓은 고장이에요. 애정을 주면 더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나주가 에너지 도시인 것 알고 계시지요. 영산강 정자 문화도 멋져요. 담양이나 함양에 뒤지지 않아요. 다음에 오시면 그 이야기 들려 드릴께요. 

     

천연염색박물관, 빛가람 전망대, 도래 한옥마을, 반남 공원 등도 둘러보세요. 문화관광해설사가 친절하게 안내해 드릴 겁니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다음 여행지를 어디로 하면 좋겠느냐고, 물줄기를 따라 영암도 좋겠지만, 함평이나 무안은 어떻겠느냐고 한다. 하긴 느러지 전망대에서 무안에 부채의식을 느끼긴 했다.  

    

여행을 계획하고 이끈 최순희(화순군)‧ 안내와 해설을 주신 양성숙(나주시), 두 전남문화관광해설사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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