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신 하나님 안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로

251012 사도행전 5:1-4

by 어린양

정직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바르고 곧아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입니다. 이는 사실 그대로 말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태도를 뜻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정직은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을 다룹니다. 단순히 도덕적 행실이나 윤리적 기준을 지키는 수준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진실함, 즉 마음과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일치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직은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 '규칙을 어기지 않는 사람'으로 한정됩니다. 학교에서는 시험 부정을 하지 않는 학생을, 직장에서는 보고서를 속이지 않는 직원을 정직하다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런 정직은 외적인 기준에 머물러 있으며, 종종 타인의 평가에 따라 판단됩니다. 때로는 '들키면 안 된다'는 두려움 속에서 유지되기도 합니다.


반면 성경이 말하는 정직은 두려움의 윤리가 아니라 관계의 윤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신앙의 태도이며, 인간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진실하게 서는 삶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정직은 '드러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이자, '하나님 앞에서 숨김이 없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정직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정직: 존재의 일치


하나님은 정직의 근원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정직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며 말씀하신 대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며"(민수기 23:19).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이사야 55:11).


둘째, 하나님은 말과 행위가 일치하시는 분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행하시며(신명기 7:9), 그분의 공의와 인애는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며 사람을 속이지 않으십니다. "그의 말씀은 참되며, 그의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시편 33:4). 하나님은 스스로 충만하시기에 과장도, 결핍도, 과욕도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정직은 단순히 '거짓이 없음'을 넘어섭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위, 그리고 약속 사이에는 어떤 간극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자신 안에서 일치하시며, 스스로 충분하시기에 누군가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정직은 존재 전체가 하나로 일치된 완전함입니다.


정직의 언어: 흔들림 없는 일관성


성경에서 정직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여러 단어로 표현됩니다. '에메트(אמת)'는 진실과 신실함, '야샤르(ישׁר)'는 곧음, '타밈(תמים)'은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흔들림 없는 일관성'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분이시며, 그분의 성품 자체가 진실이기에 그분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정직은 단순히 '거짓이 없음'을 넘어, 무너짐 없는 내적 일관성과 진실을 포함합니다. 즉, 정직은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삶의 방향이며, 하나님과의 일치 안에서 완성됩니다.


성경적 정직의 모범: 다윗과 욥


시편 51편의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편 51:17)는 그의 고백은 정직이 단지 '거짓이 없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숨기지 않는 용기'임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범죄 이후에도 하나님께 돌아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고, 그 정직함이 회복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또한 욥은 시련 가운데서도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기 1:1)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정직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일관성이었습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부정하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함을 인정하셨습니다.


이 두 인물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숨김없는 진실함을 보여줍니다. 정직은 인간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심 앞에서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태도입니다. 우리의 정직은 하나님의 정직하심을 닮아가야 합니다. 단순히 거짓말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숨기지 않는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속의 정직: 자유의 언어


우리는 종종 정직이 세상살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요령 있게 사는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라 믿기도 합니다. 회사나 사회 전반에서 부정직이 만성화된 모습을 볼 때마다 정직이란 단어는 이상적으로만 들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정직은 결코 쓸모없는 미덕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을 든든히 세우는 힘입니다. 정직은 사람의 신뢰를 세우고,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키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인생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은 왜, 그리고 어떻게 정직하실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과장도 축소도 없으시고, 결핍도 과욕도 없으십니다. 자신을 꾸며 보일 이유도, 남보다 앞서기 위해 속일 이유도 없습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완전하므로 하나님은 정직하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과 정직하지 못한 관계를 맺을 때 우리 삶은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그 충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장하며 살아갑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뒤 숨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숨습니다. 그 숨음이 병든 삶의 시작입니다. 비교와 과시가 스며들고, 거짓된 자신을 만들어냅니다. 정직이 사라진 자리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자리합니다.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를 맺지 못하면 결국 진실에서 멀어지고 병든 관계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직하심 앞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정직


하나님은 완전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기에 그분의 정직은 폭로가 아니라 회복을 낳습니다. 우리의 정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드러내기 위한 정직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우는 정직이어야 합니다. "정직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백 퍼센트의 투명함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를 위해 해야 할 말을 하고, 보호해야 할 것은 지킬 줄 아는 것입니다. 인정이나 이익을 위한 말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언행이 참된 정직입니다. 정직은 관계를 깎아내리는 무기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정직이 진리를 드러내면서도 인간을 파괴하지 않듯 우리의 정직도 사랑을 동반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니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사도행전 5:1~3). 이 사건은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지만 동시에 신앙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나니아'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삽비라'는 "아름답다"를 뜻합니다. 이름만 보면 이 부부는 이미 복된 사람들입니다. 은혜롭고 아름다운 이름처럼 살았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들의 삶은 그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흘러갔습니다. 겉으로는 헌신적인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헌신은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팔아 일부를 감추고도 모두 바친 것처럼 꾸몄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바나바의 헌신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후반부를 보면, 바나바가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행전 4:37). 그의 행위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쁨으로 나누는 진실한 헌신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밭'의 헬라어는 'ἀγρός(아그로스)'로 '들판·농지'를 뜻합니다. 이는 '밭'을 팔아 하나님께 드린 바나바의 헌신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바나바처럼 보이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소유를 팔고 헌금하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의 헌신은 바나바의 헌신과 다르지 않아 보였고, 공동체 안에서는 칭찬받았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러나 그 감동적인 장면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내면을 꿰뚫어보았고, 감추어진 거짓이 드러났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잘못한 것은 '모든 돈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행 5:4)라고 말합니다. 즉 그들이 얼마를 내든 그것은 자유였습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동기였습니다.


감추어진 마음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행 5:2).

여기서 '감추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νοσφίζομαι(노스피조마이)'입니다. 이 동사는 '몰래 떼어두다·빼돌리다·착복하다'의 의미를 가지며, 신약에서 드물게 쓰이는 단어입니다(행 5:2; 딛 2:10). 중간태는 '주어가 행위에 깊이 관여하며 그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단순히 행동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행동에 깊이 관여하며, 자신의 의지와 이익을 걸고 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아나니아의 행위는 우연한 거짓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계획된 은폐였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의 유혹에 넘어진 것이이 아니었습니다. 부부는 서로 상의했고, 공동체의 신뢰를 속이면서도 겉으로는 헌신적인 사람으로 보이길 원했습니다. "이 공동체 안에서 명예는 지키되, 손해는 보지 말자." 그들의 거짓은 단순한 재정상의 부정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한 불정직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내면의 이중성을 베드로를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베드로의 말하기는 폭로가 목적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사랑의 결단이었습니다. 정직은 때로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진짜 정직은 불편을 감수할 만큼 사랑을 지키는 태도입니다.


바나바와 아나니아의 대조, 헌신의 본질


본문의 또 다른 핵심은 헌신의 본질을 비교하는 데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바나바가 판 것은 ‘밭’입니다. ‘대대로 물려받은 삶의 터전,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의미합니다. 즉, 바나바는 자신의 생애 기반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반면 아나니아가 판 것은 ‘소유’입니다. 헬라어로 크테마(κτῆμα)이며, ‘개인이 축적한 재산’을 뜻합니다.

두 단어는 본질적으로 다른 뉘앙스를 지닙니다. 바나바는 하나님께 받은 터전을 드렸지만, 아나니아는 자기 힘으로 모은 소유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세우려 했습니다.


재산을 가진 것이 죄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했는가, 자신을 위해 사용했는가였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단순한 거짓이 아니라, 성령을 속이려 한 시도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 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사탄은 언제 마음에 틈을 탈까요? 바로 결핍감, 비교의식, 인정욕이 자리할 때입니다.

그 틈을 통해 사탄은 속삭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하잖아.”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이 만든 포장 속에서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병든 신앙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우리 마음 깊은 곳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삶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때, 사람은 스스로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정직은 ‘숨김이 없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투명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질 때도, 숨을 때도 아십니다.

그분은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해 진실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분하시기에 과장도, 결핍도, 과욕도 없으십니다.

정직은 바로 그 하나님의 충분하심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충분함을 믿을 때, 비교와 과시에서 벗어나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직은 단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숨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 자유로움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회복을 경험합니다.


세상의 질서와 하나님의 질서


초대교회에는 '모두가 반드시 전 재산을 바쳐야 한다'는 규칙이 없었습니다. 강요가 아닌 자발적 나눔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모두 바쳤다'고 거짓말을 했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사람들 앞에서 '바나바처럼 보이길' 원했습니다.


당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예루살렘에는 사적 소유와 축적의 문화가 확산되었습니다. 경쟁과 차별, 불평등이 심화되던 시기에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는 새로운 질서—자발적 나눔과 상호부담—의 공동체를 보여 주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회복의 흐름을 거슬러 '옛 질서'의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들의 불정직은 개인의 일탈을 넘어 하나님의 공동체 질서를 훼손하는 행위였습니다.


충만의 방향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행 5:3). 여기서 '가득하다'는 'πληρόω(플레로오)'로 '채워지다·충만하다'를 뜻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할 마음자리에 사탄의 생각이 들어선 것입니다. 사탄은 보통 갑자기 침입하지 않습니다. 비교심, 인정욕, 결핍의 불안 같은 작은 틈을 통해 천천히 스며듭니다. 그 틈을 방치하면 마음은 서서히 거짓으로 채워집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본래 이름처럼 은혜롭고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으나, 비교와 인정욕이 마음에 틈을 만들자 본래의 은혜와 아름다움은 무너졌습니다. 정직의 상실은 존재의 왜곡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 정직은 단순한 윤리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며, 그 관계의 최종 상대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를 냈는가보다 '얼마를 숨겼는가'를 보십니다. 정직은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입니다. 숨기지 않는 투명함, 비교하지 않는 자유,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는 태도—이것이 하나님 앞의 정직입니다.


정직을 흔드는 내면의 유혹


이 장면은 고대 예루살렘의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정직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에서 비교의 무익함을 말합니다. "백합은 자기 자리에 뿌리를 내릴 때 가장 아름답다. 더 좋은 자리를 찾아 뿌리를 옮기는 순간 시들어버린다." 비교는 우리의 뿌리를 흔들고, 그 흔들림은 정직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업보다, 그 작업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증명하려 하는가를 보십니다. 정직은 단순히 거짓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진짜 방향을 직면하는 일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보다, 왜 그것을 하고 있는가—그 질문이 정직의 출발점입니다.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저서 『야망의 대가(Against the Tide of Ambition)』에서 이 키르케고르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인간 내면의 야망과 비교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름답게 피어 있는 한 송이 백합에게 한 사악한 새가 다가와 속삭입니다.

"너보다 더 아름다운 백합들이 다른 곳에 피어 있다. 그곳으로 가면 네 아름다움이 진짜로 증명될 것이다."

백합은 그 말을 믿고 새에게 부탁합니다. "내 뿌리 주위를 쪼아내 줘, 나도 그곳으로 가고 싶어."

그러나 흙에서 빠져나온 순간, 백합은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볼프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야망의 끝은 스스로의 죽음이다."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의 손에 뿌리를 내릴 때만, 존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백합의 이야기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닮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은혜롭고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충분함을 누리지 못한 채 '다른 이들보다 더 은혜로워 보이고 싶다'는 마음에 흔들렸습니다. 뿌리는 하나님이 아닌 비교와 인정욕으로 옮겨졌고, 결국 스스로 시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높은 자리'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진실하게 뿌리내리길 원하십니다. 그 뿌리가 곧 정직입니다.


거룩한 불편함


본문에는 또 다른 인물이 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람들의 분위기를 따라 거짓을 꾸며냈다면, 베드로는 그 분위기를 깨서라도 하나님의 정직함 앞에 섰습니다. 그의 정직은 단순한 폭로가 아니라 하나님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거룩한 용기였습니다. 정직은 언제나 불편합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침묵은 정직이 아닙니다. 정직은 진리를 말하되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세우기 위한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비교는 거짓을 낳는다.

둘째, 정직은 진리를 세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름처럼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이미 은혜롭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비교의 속삭임은 언제나 그 자리를 흔듭니다.

진짜 정직은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만족할 줄 아는 믿음”입니다.


또한 성경은 "얼마"라는 단어로 작은 타협의 위험을 비춥니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얼마만 가져다가"(행 5:2). 보이는 전부와 실제 전부 사이에 숨어 있는 '얼마'—스스로에게 유리하게 남겨 둔 몫이 공동체를 무너뜨렸습니다. 정직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일관성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냈는지가 아니라, 얼마를 숨겼는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으로 충분한 정직


증명하려는 욕구는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생깁니다. 누군가가 단순히 나를 미워한다면 더 애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부족해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믿는 순간 사람은 끝없이 증명하려 합니다. 더 잘해야 하고, 더 보여줘야 하고, 그래야 인정받고 사랑받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직은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그 뿌리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상처를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진짜 회복으로 나아갑니다.


정직은 때로 관계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자기만족이 아니라 회복과 치유를 위한 정직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택했고, 그 정직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폭로가 아니라 다시 세우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도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 앞에 서야 합니다. 정직의 회복은 '행동의 개선'이 아니라 '충분하신 하나님 안에 머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할 때 우리는 '얼마간의 타협'을 내려놓고 온전한 자유 안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부만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얼마'가 아니라 전부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실을 진심으로 믿을 때 우리는 바나바처럼 기꺼이 우리의 전부를 드릴 수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 사람은 '얼마간'을 계산하고 비상금을 남기며 스스로를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만큼"이 아니라 "얼마든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정직은 조건 없는 사랑에서 나오며, 우리가 그 사랑을 신뢰할 때 정직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의 언어가 됩니다.


세상은 언제나 사람을 '얼마'로 평가합니다. 얼마를 벌었는지, 얼마나 가졌는지, 얼마나 잘하는지로 가치를 매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이나 결과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사랑하십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까지도 알고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믿을 때 우리는 비교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로 설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참된 평안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합니다. 때로 비교에 흔들리고, 인정욕에 지고, 불안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속도와 거리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분은 약속을 남발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속도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 하나로 충분하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다시 정직을 배웁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서 있는 평안—그것이 정직의 완성입니다. 정직은 결국 하나님으로 충분함을 믿는 사람의 자유로운 언어이며, 그 믿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본 묵상일기는 새숨교회 전영훈 목사님의 설교에서 받은 말씀을 토대로,

제 개인적인 생각과 일기를 덧붙여 정리한 글입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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