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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제의 생각 공간 Oct 16. 2020

민제 키우기-2

머리색이 빨강인 민제

며칠째 야근이다. 광화문에서 정상적으로 퇴근하고 7시쯤 광역버스를 타면 서대문에서 부터 막히기 시작한 길은 연세대 앞까지 밀린다.

다시 수색역까지 조금씩 가다서다를 반복하다가 국방대학교를 넘어 화전 근처 항공대학교까지 가면 뻥뚫려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대 화도교를 지나면 서정마을이 나오고, 정류장. 다시 소만마을이 나오고, 정류장, 다시 행신동이 나오고, 정류장. 그리고 행신초등학교에서 내리기까지 4정거장을 거쳐야한다.

다행히 내리면 7시 40분쯤, 아무짓도 하지 않고 내가 사는 아파트까지 바람과 같이 걸어도 어느새 8시쯤.

7살 민제는 자신과 닮은 아빠를 기다리다 꿈나라로 떠나버렸다. "할머니 아빠는 왜 안올까?", "데이트하러 갔을까?".

민제의 머리속에도 엄마가 없는 아빠는 밖에서 다른 여자와 만나고 있는 줄 생각이되는 것 같다.

씁쓸해진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민제에게 가끔 물어본다. "민제야 새엄마 데려올까?". "아니". "왜". "할머니 돌아가면"이란다.

아직까지 민제에겐 엄마대신 자신을 돌봐줄 할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잠들어있는 그녀석을 보고 싶어 방에 들어간다(참고로 난 거실에서 잠). 얼굴을 쓰다듬으며 가만히 들여다 본다.

날 닮아 빨강 머리, 긴 속눈썹, 그리고 자기 엄마를 닮아 두뺨에 깊게 들어가는 보조개, 가름한 턱선, 우성인자는 다 갖춘듯하다.

오늘이 금요일인데 이번주는 저녁에 단한번도 그녀석과 함께 놀아주지 못했다.

지난 주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역발산 기개세'를 가르쳐줬다. "아빠 무슨 뜻이야"라기에 "매일 배우고 배우면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의 첫구절이다.

역발산 기개세, 한서열전에서 항우가 했던 말이다. 나의 힘은 산을 뽑을 듯하고 기는 세상을 덮을 듯하다.

너무 어려웠던지 외우려 하지 않았다. 난 한마디 했다. "그거 내일 아빠 올때까지 다 못외우면 앞으로 마이쮸 안사주꺼야"라고 했다.

그때 종이와 연필을 들고 오더니 써달란다.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 달달 외웠다. 기특했다. 그리고 씁쓸했다.

난 민제와 함께 슈퍼마켓에 가서도 눈망울이 똘망똘망해지며 나에게 뭘 원하는 눈초리를 보낼 때면 "딱 하나만 골라"라고 한다.

말도 잘 듣는데 영리한 놈. 가장 비싼 과자를 고른다. 머리를 쓰다듬어줘야할지. 아무튼 아빠가 많은 시간을 함게 있어주지 못하는 민제는 스스로 자신의 몫을 챙기는 법을 배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육아'가 아닌 21세기를 살아가는 7살 아이의 생존법이다.

오늘은 기필코 일찍 들어가 민제가 잠들기 전에 논어와 역발산 기개세를 외우고 있는지 확인해보련다.

이런 식이라면 명심보감을 건너뛰고 소학이나 대학부터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회사에 모 대학 동양사학과를 나온 후배도 조선 28대 왕을 다외우고 있지 못하는데 민제는 태정태세문단세..... 줄줄 외운다. 그리고 유즈스쿨을 보며 영어도 하고 어찌 할게  됐는지 유튜브에 민제 Tv라는 것도 만들어 지가 찍은 자신의 모습을 담아 동영상을 업로드한다.

그리고 내 휴대폰의 패턴도 몇번 시도하면 풀어버린다. 부모들에게 말하고 싶다. 학원에 보내지 말기를, 놔두면 알아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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