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의 아이디어 도출에 대해
최근에 백종원씨가 나와서 전국의 휴게소를 돌면서 그 지역에서 판매가 부진한 농수산물을 가지고 새로운 메뉴를 소개하는 프로를 봤습니다.
그 중 제 눈길을 끌었던 것은 멸치를 훈연해서 가다랑어포의 맛을 내는 에피소드였습니다.
멸치 중에서 국물용으로만 사용하는 큰 멸치는 다른 용도가 별로 없어서 수확량에 비해 수요가 많지 않고, 때문에 가격이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백종원씨는 이를 활용할 방안이 없을지를 고민하다가 훈연을 해서 가다랑어포와 똑같은 맛이 나게 만들면,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는 가다랑어포를 국산으로 대체할 수도 있고, 가격도 더 저렴해서 우동가게나 멸치 어부들 모두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더군요.
예전에도 백종원씨가 골목식당 프로그램에 나와서 국수용 멸치를 활용해 멸치장조림을 만들고 다시 그 멸치를 김밥 재료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었는데, 그 아이디어에서 한 발 더 나간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백종원씨야 원체 유명하신 분이니 저 같은 사람이 유명세에 한 줄 더 추가하려는 것은 아니고, 제가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든 생각이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라는 것이 저래야 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한번 정리해보면 좋겠다 싶어 이 글을 씁니다.
'스타트업'하면 어떤 단어들이 떠오르시나요? 순서의 차이는 있겠지만 틀림없이 '혁신'이 리스트에 있을 것입니다. 스타트업은 세상이 없던 것, 어떤 혁신적인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활용이 가능한 로켓을 만들어 인공위성 발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거나, 눈길과 계단에서도 걸어갈 수 있는 네발 로봇을 만들거나, 바둑으로 프로 기사를 이기는 AI 프로그램 정도는 만들어야 혁신으로 보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예시들은 혁신의 의미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들일 겁니다. 젊고 창의적인 젊은이들이 만드는 스타트업이라면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 하겠죠. 하지만 스타트업과 그 혁신을 이 범주에서 본다면, 정의에 부합하는 기업은 정말 소수일 것입니다. R&D에 미친듯이 투자할 수 있는 기업들 말입니다.
우버, 아마존, 페이스북 등은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스타트업이거나, 스타트업이었던 회사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R&D를 통해 세상에 없던 그 무언가를 만들어냈거나 불가능에 가까운 기술적 도전에 성공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기업이 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선도적인 기업이지만 이들의 초창기는 기술 회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쿠팡이나 배달의 민족, 무신사 같은 회사들도 같은 맥락입니다. 기술회사로 출발한 것도 아닐 뿐더러 이들이 세상에 없던, 그 누구도 생각조차 못했던 혁신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물론 '플랫폼/유통 기업들이 무슨 스타트업이냐, 수수료 먹는 양아치일 뿐이다'라고 평가절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집도 절도 없는 맨바닥에서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시는 분은 없으실 것이고 또 스타트업의 원래 의미가 혁신의 총아가 아닌, '빠르게 성장하는 신규 업체'라는 것 또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는 굳이 거창하고 세상을 다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 패스파인더넷은 지금까지 초기 스타트업 약 1천여 곳을 코칭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꼭 기술적 영역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다 바꾸겠다는 포부로 덤벼드는 기업을 많이 봤습니다.
본인들이 만든 장비가 1인 가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팀, 데이터에 블록체인을 적용해 보안 문제를 100% 해결하고, 코인 이코노미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팀도 수십 개 봤습니다. 공급자와 사용자를 연결해서 유통의 비효율이나 사회 문제를 없애겠다는 팀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팀 콘텐츠를 유튜브에 올리기만 하면 세상이 주목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팀들의 사업 성공률은 스타트업의 평균 성공율에 수렴했습니다. 즉, 이미 망했거나 망하기 직전이라는 이야기죠.
이 분들의 아이디어는 가지각색이었습니다만 공통점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실제 현장과는 매우 거리가 먼 아이디어였다는 점입니다.
1인 가구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분은 직장인 생활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워지자 본인이 자취하던 시절, 그러니까 15년도 더 된 이야기를 들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블록체인 팀 태반은 단순히 담당 교수님의 권유로 시작하게 된 것이었구요. AI 관련 팀의 상당수는 파이선을 배운지 1년도 안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분은 유명 유튜버가 만든 회사에서 영상편집하다가, 나도 만들 수 있겠다 싶어서 창업한 사람이었습니다.(이 분의 회사생활 총 경력은 3개월입니다.)
반면에 강아지 사료만 몇 년을 들여다보다 본인의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콘텐츠 커머스로 창업한 팀도 있었습니다. 소프트웨어 분야 교수님으로 20여 년을 재직하며 틈틈이 특허를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창업한 분도 있었죠.
두 집단의 차이는 경험의 유무와 기간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혹은 자기 분야에 대한 열정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현실에 대한 이해도'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해도는 해당 분야에서 오래 일하거나 열정이 많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건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문제점을 짚어낼 수 있느냐의 차이죠.
물론 한 분야에 오래 몸 담고 있으면 현실이 보이긴 하지만 거기 매몰되어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생각해서 독선적으로 변하기도 하구요. 또 열정이 과하면 현실의 문제가 아닌, 고객은 관심도 없는 자기 혼자만의 문제를 풀겠다고 덤벼들게 됩니다. 어느 정도의 순수한 열정은 필요하지만, 그 이상의 열정은 문제 해결보다는 자신이 두각을 나타내고 싶다는 에고의 발현인 경우가 많거든요.
기술 혁신을 추구하는 창업이 아닌 경우, 그 아이디어는 철저하게 현실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고객이 느끼는 문제를 고객의 시선에서 풀어내야죠.
많은 경우 혁신은 사실 한방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작은 문제를 풀어내고, 그 문제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시장을 키우거나, 혹은 그 문제 해결과정에서 얻어낸 솔루션을 보다 넓은 시장에 맞춰 변주해 나가는 식으로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 백종원씨 예로 돌아가자면 다시 멸치 낭비를 하지 않으려고 적정량을 사용해서 국수용 국물을 내는 법을 찾고, 그것만으로는 멸치가 아깝고 식감이나 맛이 남아 있으니 장조림에 활용하고, 김밥용 속재료로 사용하고, 이건 또 분식집에만 적용 가능하니 다른 방식, 가령 훈연 같은 방법을 써서 가다랑어포를 대체할 수 있게 하는 식입니다.
매우 작지만 현실적인 문제에서 일단 출발하고 여기서 한발 더 나가고 다시 한발 더 나가는 겁니다. 이 과정이 느리고 볼품없고 대단할 것 없어 보이지만 이런 축적의 과정이 있어야지만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솔루션을 만들어 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꾸 잊어버리지만 유튜브의 시작은 연애 못하는 솔로들이 자기 소개하는 동영상을 올리는 서비스였고, Pinterest 는 오픈하고 6개월넘게 불과 수백명의 고객이 있었을 뿐이었으며, 쿠팡은 동네 마사지 할인 쿠폰 팔던 업체였습니다.
창업 초기부터 창업자들이 머리속에서 현재의 거대한 위상들을 꿈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유튜브는 소비자들이 제작하는 영상을 공유하는 서비스라는 본질을 잃지 않았고, Pinterest 는 고품질의 사진을 찾는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왔고, 쿠팡은 많은 고객이 대량으로 구매해서 가격을 낮추는 문제를 계속해서 해결하려고 노력해온 업체입니다.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Hardcore R&D 가 아닌 이상 스타트업의 혁신은 큰 것이 아니라 작은데서 출발한다.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는 철저하게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풀어야 한다.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는 정말 작은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에서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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