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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ul 02. 2022

제조 스타트업과 MVP (I)


제조 스타트업과 MVP 이야기 (I) 


세 곳 정도의 제조 스타트업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으로 관련 글의 예시로 계속 사용합니다.)  


(1) 미숫가루를 이용해 독특한 맛의 막걸리는 만드는 제조업체


(2) 공장 설비의 유지보수 효율성을 높여주는 IOT 장비 및 S/W 제조업체, 


(3) 폐플라스틱을 비용효율적으로 재활용해서 거푸집 등 산업재용 원재료를 만드는 제조업체 


이들의 사업 극 초기 모습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아마도 이들 모두 일정 기간은 매출없이 R&D를 해야 할겁니다. 어느 날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들이 아니니까요. 물론 (1)은 R&D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을 수 있지 않을까 싶겠지만, 판매는 논외로 치고 생산 측면에서만 생각해도 집에서 한두번 맛있게 만드는 것과 제조업체로서 대량 생산을 위한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생산 배치마다 맛의 균질성을 유지하고, 유통기한을 최대한 늘릴 수 있게 하는 기술 등은 절대로 단기간에 만들어낼 수 없죠. 수백개 업체가 막걸리를 만든다고 도전하지만 제대로 유통되는 업체는 몇 십개 안되는 이유기도 하구요. (연구 개발만 하고 OEM 주면 안될까 싶겠지만 초기라면 몰라도 영업력이 탁월한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원가 문제나 레시피 등의 문제로 결국 스케일업하면서 자체 제조 해야 합니다.) 


(2)번과 (3)번은 아마도 대학 실험실 팀이거나 관련해서 연구하던 연구소의 연구팀이 독립하는 경우가 대부분일겁니다. 상업화 이전에 역량이 상당 시간 쌓이지 않으면 판매 가능한 제품을 준비하는데만 몇 년 걸릴 기술들이니까요. 


이런 팀들은 MVP 수준의 제품을 만들려고 해도 몇 년의 노력이 선행됩니다. 때문에 고객사에 가서 테스트를 해보는 수준 혹은 막걸리를 대량 판매하지 않고 동네 가게에서 주전자로 판매하려고 해도 이미 투자한 것이 굉장히 많은 상태가 됩니다. 몇 달만에 뚝딱 MVP 를 만들고, 그게 삽시간에 입소문나서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어플 등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죠. 


즉, 제조 스타트업은 이미 제품 개발 그 자체로 다른 회사들보다 월등히 높은 ‘sunken cost’가 발생합니다. 이 어플 만들다가 안되면 저 어플 만드는 식의 피봇은 꿈도 꾸기 어렵습니다. 막걸리 만들다 청주를 만들거나, IoT 장치 만들다가 부품으로 바꿔서 대형 설비 제조업체에 납품하거나, 폐플라스틱 원료로 거푸집 업체에 팔다가 철도용 침목 업체에 판매할 수는 있겠지만, 이 정도가 피봇의 한계죠. 그 이상 움직이게 되면 앞서 제품 개발 과정에서 쓴 비용 회수는 꿈도 못꾼 채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셈이 됩니다. (뭐, 게임 업체가 가령 MMORPG를 만들면 몇 백억 우습게 써야 합니다. 하지만 대기업이 아닌 스타트업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곳은 없죠. 제조가 아닌 소프트웨어나 플랫폼 스타트업이 제조처럼 초기 제품 개발에 큰 돈과 긴 시간을 들인다면 이미 백번은 망했을 겁니다.) 


때문에 제조는 ROI 이전에 일단 투자금 회수 자체가 오래 걸립니다. 투자자들이 안좋아할 첫번째 조건입니다. 


두번째로 생각해볼 점 세 업체의 제품군의 시장 규모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국내 막걸리 시장은 소매액 기준으로 그래도 이~삼천억원대 이상이라고 하니 막걸리 제조업체들 입장에서 그래도 15백억원 이상의 시장입니다. 


산업용 IoT 장비 시장은 얼마나 될까요? 국내에서 공장을 가지고 제조하는 업체가 그래도 칠십만개는 되니 이 고객사당 1천만원씩만 납품해도 7조원입니다. 한 3년에 한번씩 리뉴얼한다고 하면 연간 평균 2조5천억쯤 된다는 뜻이죠. 하지만 자세히 까보면 중견기업 이상의 제조업체들의 장비들은 이미 자체로 충분히 유지보수를 위한 각종 하드웨어와 시스템이 구비된 장비들입니다. 기껏해야 파일럿 라인이나 R&D 라인 정도만 이런 고가 장비를 사용하지 않겠지만, 이런 곳에는 자동화된 유지 보수를 위한 IoT 수요가 별로 없겠죠. 또 60만개 이상의 제조업체들은 매출액 20억원도 안되고, 인원도 10여명이 조금 넘는 매우 영세한 기업들입니다. 이런 곳들이 ‘IoT 장비를 이용해서 유지보수를 자동화하고 데이터화 하려고 한다?’ 라고 상상하기 어렵죠. 이들도 빼야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 국내에서 유지보수 자동화에 대한 수요가 있으면서도 자동화 기술이 자체 내장된 고가의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 제조업체는 많아야 5만개 내외일 겁니다. 여기서만 생각해도 시장 규모가 2천억원도 안되게 줄었습니다. 그리고 공장 유지보수를 위해 IoT 장비를 설치하려면 생산을 멈추고, 장비에 따라서는 기존 설비를 해체했다가 다시 설치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할 수도 있죠. 유지 보수를 자동화하기 위해 이런 수고를 할 기업이 얼마나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시장은 더 줄어듭니다. 물론 IoT 장비를 위해 1천만원이나 지불할지도 미지수이지만, 확실한 건 이보다 금액이 커지면 그냥 사람을 고용하는게 더 싸질 겁니다. 때문에 산업 설비 유지보수를 위한 IoT 장비와 소프트웨어 시장 규모는 아무리 커도 1천억원을 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한 원료 생산 시장도 대략 3천억원 정도라고 합니다.  (기존 신규 플라스틱 또는 콘크리트 재료 등과 대체 관계에 있는 산업재 시장에서 원료 비중에 따른 추정치) 


그런데 배달앱 업체들의 매출액은 2조원을 넘고, 게임 업체들의 매출액도 몇 조원대가 나옵니다. 사진보정앱 업체들의 매출액도 몇 천억원은 우습게 넘어가죠. 게다가 하드웨어와 달리 해외 시장 진출도 좀 더 원활하게 할 수 있죠. 언어 바꾸고 퍼블리싱 관련 준비 정도만 하면 되니까요. 앱스토어에 수수료는 좀 빼앗기겠지만 그래도 별로 어려운 일 아닙니다. 


몇 년을 죽도록 고생하고, 엄청난 기술을 축적해야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제조업이라고 해봐야 시장 규모 몇 천억원이 안되는데, 개발자 몇 명이서 뚝딱뚝딱하면 만들어내는 서비스가 몇 천억원이 아니라 조 단위도 우습게 넘어가는 거, 뭔가 억울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투자자들에게 제조 스타트업이 쉽게 어필하지 못하는 두번째 이유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국내 막걸리 제조 업체는 수백개가 넘습니다. IoT 장비를 제조하는 업종도 과거 소형 센서 개발 업체들이 거의 다 뛰어들었으니 역시 최소한 수십개는 될 겁니다. 폐플라스틱을 활용해서 산업재 원료를 만드는 업체는 몇 개 없겠지만, 고객들이 꼭 폐 플라스틱 원료만 써야 하는 것 아니고, 신규 플라스틱이나 콘크리트 등 다양한 대체 원료가 있고, 수입산도 많을 것이기 때문에 여기는 아예 수천개 단위의 경쟁사가 있을 수도 있죠. 투자자의 외면을 받기 쉬운 조건 세번째 입니다. 


이처럼 시장 상황만 정리를 좀 해봐도 제조 스타트업은 투자를 받는게 신기한 지경이 됩니다. 정부 R&D 지원금이나 각종 지원 사업에서는 그래도 힘을 좀 발휘하겠지만, 이미 제품의 기초적 개발 단계에서조차 시장에서의 성공이 아득해 보이는 것이 제조업이니까요. 


이상이 알려주는 것은 제조 스타트업은 우선 초기에 자기 돈이 크게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기술을 보유했다는 사실과 관련 시장의 규모가 충분히 크고, 그 기술로 경쟁을 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외부에서 이 위험도 높은 투자를 선뜻 도와줄 사람 찾기가 어려우니까요. 여기까지만도 몇 년의 노력과 몇 억원 이상의 돈입니다. 만약 고난이도 기술 제품이라면 돈은 기하급수로 늘어나겠죠. 


이런 이유로 제조에 관심이 있다면 무엇보다 시장의 선택이 굉장히 중요해집니다. 단순히 내가 오랫동안 해왔거나, 잘하는 분야라는 것이 시장을 선택하는 이유가 되면 위에서 설명한, ‘수많은 제약 사항과 경쟁사와 긴 투자 회수 시간’을 상수로 놓고 사업을 해야 하는 시장에 진입하게 됩니다. 내 돈과 시간을 대규모로 투입하고도 시장의 주체가 아닌 종속 변수가 되는 사업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다른 스타트업과 달리 제조업체는 MVP 제조 및 마켓 테스트가 사업 초창기 해결할 숙제에서 후순위에 놓입니다. 그보다 초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시장’에 들어갈 것이냐 입니다. 내가 몇 년간 연구해 왔기 때문에 그 시장에 ‘자연스럽게’ 진입하면, 스타트업이 아니라 그냥 중소 제조업체로서 시장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상황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중소 제조업체 대부분은 사장님이 월급 많이 주기 싫어서 직원 월급 짜게 주는게 아닙니다.) 


이런 시장에 들어가기 싫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너무도 기술적으로 앞서 나가서 경쟁사가 나오기 어려운 영역을 개척하라는 뜻이냐 하면 그건 당연히 아닙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 같은 기술력의 업체가 30년을 맨땅에 삽질해도 매출액 1천억원도 안나오는 상황인데 이런 짓을 하라고 부추길 수는 없죠. (모더나처럼 아예 R&D만 전문적으로 하겠다는, R&D 스타트업의 길을 가는 경우는 제외. 하지만 이들은 제조업이 아니죠.) 물론 테슬라처럼 천조원이 넘어가는 자동차 시장을 타겟으로 가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테슬라 이야기입니다. 수천억원의 자산을 그 전에 이미 가지고 있었던 일론 머스크가 다시 수조원의 투자금을 받아들여서 무려 10여년이 넘게 적자를 내면서도 버텨낼 수 있는 주머니 크기와 맷집, 그리고 비전을 가진 경우에만 해당되는 특혜죠. 사업 시작할 때 테슬라나 애플을 꿈꾸는 것은 자유지만, 70억분의 1 확률은 로또보다도 낮은 확률입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개인의 커리어를 선택할 때는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 중 하나이지만, 스타트업이 사업 도메인을 결정할 때는 절대 앞에 놓아서는 안되는 기준입니다. 이 기준으로 사업 도메인을 정하고 시작하게 되면 뒤로 돌아갈 수가 없어지거든요. 특히 제조업은 뒤로 못갑니다.


그래도 내가 해온 일이 있고, 아는 기술 분야가 있고, 다른 분야는 도저히 관심도 애정도 안생겨서 고생할 각오하고 위에서 묘사한 것 같은 시장에서 제조업을 이미 시작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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