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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제작소 Jan 11. 2021

보기에 좋았던 것들이 사라지는 시간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

본 글은 스포일러와 줄거리, 평가가 없는'3無 영화읽기' 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이유를 말씀하지 않았다. ‘흑암’의 깊음 위에서 처음 빛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궁창(하늘) 위와 아래를 물로 나뉘고 하늘을 창조한다. 다시 물을 가르고 땅과 바다를 만들고 이름을 붙인다. 이제 이곳에 생명의 기운들이 돋아 난다. 하루에 하나씩 천지를 창조할 때 마다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보기에 좋았더라’고 감탄을 이어간다. 


창세기 1장 1절 어느 곳에서도 창조의 당위성에 대한 어떠한 이유나 설명 없이 6일 동안 순차적으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어지’게 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을 취한다. 그 이유를 설명할 존재가 없었으며, 더욱이 안식일 이후에 창조된 인간들에게 그 이유를 알리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안식일 이후 천지 만물과 인간을 만들고 자연의 질서를 부여한다. 그리고 천지 지명에 이름을 붙이고, 아담 이후에 창조된 생물들에게 태초의 인간이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한을 주게 된다. 물론 그 권한 뒤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금기의 항목이 뒤따른다. 그 금기로 인해 인간은 원죄를 갖게 되고 낙원에서 추방된다. 

이제 그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천지창조의 이유(존재의 이유)를 알기도 전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흑암 속으로 잠겨 간다. 

존재의 이유를 알기 이전에 선과 악의 구분에 눈을 뜨게 되었으니, 이후 인류는 선과 악의 선상에서 길흉화복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인류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제법많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체계화 한다. 그 와중에 인간과 만물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지금도 에덴의 동쪽에 머물고 있다. 만약 태초의 인간이 하나님의 금기를 어기지 않았다면 신의 뜻에 따라 창조된 모든 것들과 인간의 존재 이유를 들을 수 있었을까. 


‘신의 뜻’을 인간이 쉽게 짐작할 수 없지만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신의 뜻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이며 기쁨이고, 신비로우며 밝음이었다. 

146분짜리 흑백영화는 내레이션을 빼면 창세기 1장 정도 분량의 대사만 있다.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 <토리노의 말>은 천지창조의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간명하다. 그러나 그 줄거리가 일반적인 내러티브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내러티브 너머에 있는 근원적 질문에 접근한다. 천지창조의 시간을 거꾸로 돌릴 때, 신이 창조한 그 역순으로 피조물은 소멸되어 간다. 근원적 질문에 접근한다고 표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질문이 존재했던가를 되새기게 한다. 


신이 천지를 창조할 때 창조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듯이, 벨라 타르 감독 또한 천지창조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며 만물의 존재가 소멸되어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인류가 세상만물과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도 전에 순차적으로 사라져버리는 상황에 놓인다. 6일간 창조했던 ‘보기에 좋았’던 것들이 사라져버리는 상황에 안식일 이후에 창조된 인간이 마지막 빛이 사라지며 ‘흑암’으로 돌아가는 화면 속에 남는다. 


146분짜리 흑백영화는 내레이션을 빼면 창세기 1장 정도 분량의 대사만 있다. 세상만물이 특이점을 향해 소멸되어갈 때,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이유를 따지는 것조차 의미가 없을 때, 절망과 허무는 가장 늦게 창조되어 가장 늦게까지 소멸되지 않는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여기에 벨라 타르 감독이 안식일 이후에 창조된 인간을 천지창조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6일간의 시간에 배치한 이유가 될 것이다. 


원죄를 안고 태어나 에덴의 동쪽에 머물던 인류는 ‘구원’에 의해 언젠가는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의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 그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천지창조의 이유(존재의 이유)를 알기도 전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흑암 속으로 잠겨 간다. 

‘소멸’이라고 했지만 ‘근원으로의 회귀’로 읽을 수도 있다. 예전에 예술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빛의 예술’이라는 사진의 근원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흔히 사진을 시간의 예술, 빛의 예술이라고 한다. 창세기에도 나와 있지만 빛은 어둠에서 나왔으니 그 근원은 어둠이 된다. 사진은 빛을 제어하는 예술이라기보다는 어둠을 제어하는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에 동의한 적이 있다. 음악도 그렇다. 음악은 소리에서 나왔으며, 그 소리는 침묵에서 나왔다. 그래서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 아니라 침묵을 제어하는 예술이라는 것으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의 예술 세계를 이해했던 적도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6일 간에 걸쳐 그의 창작물을 스스로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감탄했듯이, 근원에서 출발한 예술작품을 창작한 작가는 스스로의 작품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 5년여를 주기로 영화를 만들던 벨라 타르 감독은 <토리노의 말>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유려한 롱테이크와 물성가득한 흑백영화를 남기고 그의 영화처럼 절망과 슬픔, 기괴하며 짙은 어둠을 던져주고 근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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