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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호 Dec 28. 2019

천재들이 모인 의과대학 VS 수능 배치표가 결정한 인생

처음 의대에 합격하고 학교에 갔을 때 했던 결심이 하나 있었다. 우리 학교는 한 학년에 약 60~70명 정도였는데, 1년 안에 모든 동기들하고 최소 한 번 이상 밥을 같이 먹어보는 것이었다. '누군가와 친해지려면 함께 식사를 해보아야 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3년의 수험 생활을 끝내고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애들이 의대에 오는 걸까?'하는 궁금증도 있었다. 나도 의대생이면서 왜 그런 게 궁금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웃기기도 하지만 그때는 모든 것 하나하나에 호기심이 넘쳤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계획은 성공했다. 1:1로 같이 식사를 한 적도 있었고, 여럿이 함께 식사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많은 동기들과 어느정도 친해질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섞이기 힘든, 나와는 성향이 많이 다른 동기들도 있었다. 그들과는 가을쯤 되었을 때 기숙사 근처에서 만나서 피자를 함께 시켜 먹을 기회가 있었다. 나랑도 친하고 그 동기들과도 친한 공통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들과 많은 이야기까지 나누진 못했지만, 어쨌든 이것도 같이 식사한 걸로 친다면 나의 계획은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처음에 멀리서 봤을 때는 '저 친구는 말도 어눌하고 공부도 잘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의대에 왔지?'라고 생각한 동기가 있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6년 동안 쭉 전교 1등만 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냥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동기는 맨날 노는 것만 좋아하고 수업도 잘 안 듣고 해서 좀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친해지고 나니 아이큐가 150이 넘는다고 했다. 동생은 머리가 더 좋아서 160 가까이 된다고 했다. 온 가족이 천재인 집안이었다.


암기력이 정말 좋은 친구는 한 번 보면 잊어먹질 않아서 '스캐너'라고 불리기도 했다. 성적도 좋으면서 악기도 수준급으로 다룰 줄 아는 동기들도 있었다.


물론 의대에 이런 천재들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여기서 말한 동기들은 워낙 특이했기 때문에 눈에 띄었던 것이고, 대다수는 평범하게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에 온 경우였다. 다만 확실한 건 의대에 들어온 동기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열심히 노력했었고, 특출난 점이 하나씩은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점이 참 신기했다.



내가 다닌 곳은 지방대 의대였지만, 확실히 의대에 온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 천재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도 그렇고 그 이후로도 그렇고, 나는 항상 만나는 사람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의대에는 왜 오게 됐어?',

'앞으로 졸업하면 하고 싶은 게 뭐야?'


고리타분한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과거를 물어보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를 물어보는 질문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는 이렇게 살고 싶다.'라는 말을 통해서 결국에는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산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의사로서의 대단한 미래 계획과 의대에 들어오게 된 훌륭한 명분이 있을 것으로 기대를 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 앞으로 뭘 할 것인가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의대에 오게 된 것도 의사로서의 특별한 사명감이 있어서라기보다, 워낙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성적에 맞춰서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아주 드물지만 '이 친구는 정말 흘륭한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멋진 사연을 가진 경우가 있긴 했다. 본래 성격이 타인과 공감을 잘하고 아프고 힘든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드는 동기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거동이 힘든 어르신들을 돕는 봉사활동을 오랫동안 했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분들을 돕고 살고 싶은데 의사 면허증이 있으면 좀더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의대에 왔다고 했다. 학기 중에도 늘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경우는 한 학년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다. 대부분은 성적 맞춰서 의대에 들어온다. 나는 이것이 교육의 문제점이자 모두에게 소모적인 낭비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당신이 환자라면 어떨까? 남을 돕고 싶어하는 사명감을 갖고 의대를 졸업한 의사와 대충 성적 맞춰서 의대에 들어온 의사가 있다면 누구에게 진료를 받겠는가? 만약 당신의 어머니가, 혹은 당신의 소중한 아들, 딸이 위중한 상태라면 어떤 의사에게 데려가고 싶은가?


나라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의사는 병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배려하고 이해해줄 잘 알아야 하지 않을까? 똑같은 의술을 갖고 있더라도, 환자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크냐에 따라서 치료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건강과 관련된 일에서는 작은 사소한 차이가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 나는 의사는 실력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의사에게 진료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른들은 아들, 딸들에게 그런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오직 공부, 성적만 올려서 어떻게든 의대에 보내려고 안달이다. 누가 의대에 붙었다고 하면 '훌륭한 의사가 되어주세요!'라고 축복하기 전에 먼저 '이제 창창한 앞길이 열렸다'면서 축하하고 부러워 한다.


이것은 너무나 큰 모순이 아닐까? 어른들이 의사라는 직업을 성공의 수단, 안정적인 고소득을 위한 직장으로 생각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배운다. 이렇게 해서 의사가 된 아이들은 더 훌륭한 의사가 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외제차를 뽑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을 우선시하게 된다.


간혹 뉴스에서 부도덕한 행위를 한 의사나 의대생의 기사가 뜨면 모두가 그들을 비난하고 욕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쁜 의사를 탄생시킨 것은 의사를 성공의 수단으로 삼고 부러워 했던 우리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배치표가 결정한 인생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나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너무 잘했고, 주변에서는 모두 '넌 의사가 될 수 있겠다!'며 기대를 했을 것이다. 매년 적어내는 장래희망 칸에는 '의사'라고 적어줘야 멋있어 보인다. 의대를 갈 수 있는 성적인데 다른 학과를 굳이 아깝게 지원할 필요가 있을까? 고난한 수험생활이 끝나고 의대 합격만 하면 인생이 바뀔 것이다. 실제로 의대에 합격했을 때 모두의 부러움을 샀을 것이다. 어딜 가든 '의대생'이라는 이유로 띄워주고 대접을 해주는 일이 반복된다. 그러면서 점점 의사로서의 지위에 의기양양해지고 그것이 당연한 줄 알게 된다.


위의 이야기는 사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때는 내가 정말로, 진정으로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조차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허상에 갇힌 것이 아니었나 싶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장래희망에 '의사'를 적어냈었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 부모님의 영향도 컸던 것 같다. 공부는 잘 하는데 명확한 꿈이 없다면 의사가 되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가 의사라고 하면 멋있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대개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하면 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기회를 갖기 전부터, 주변 사람들에 의해 진로가 정해진다. 이과인데 공부를 잘하면 의대, 치대, 한의대 등이 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전교 석차가 발표되고, 전국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게 되면 거의 확실해진다. 나는 아직 명확히 의사에 대해 잘 모르고 나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지만, 의대를 지원하겠다고 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꽤 멋있어 보이고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나는 아무 고민 없이 인생이 정해지는 것이 싫어서 한동안은 나름대로 진로 탐색이라는 것을 해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양한 직업에 대한 책과 TV 드라마 등을 보면서 의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이제 수능이 1년 남은 상태에서 진로를 고민할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별로 없다. 책과 TV를 통해서는 간접적인 경험밖에는 할 수 없다. 결국 '한 번 다른 진로도 살펴 보았다' 정도에서 만족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의대를 지망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인 것처럼 정리된다.


이 과정에서 사실 바뀐 건 없다. 처음부터 특별한 이유 없이 의사라는 진로가 주어졌고, 보기에도 그것이 멋있어 보였고, 부모님도 원하고 친구들도 부러워 한다. 그런데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거기에 도전 정신까지 생긴다. 수능이라는 것이 결국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라면, 최고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다. 고3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 기왕 하는 거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어보는 것이다. 이과에서 성적으로 제일 높은 곳은 의대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의대를 목표로 하는 것이 도전 정신을 불러 일으키고, 공부 의욕을 자극한다. 1등만 의대를 갈 수 있고, 다른 학교의 다른 학과를 간다면 2등, 3등을 한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자존심을 건드린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다른 고민을 할 필요 없이 꿈이 의대로 좁혀진다. 만약 성적이 조금 불안한데 한자를 좀 잘한다면 '한의대'를 권유 받는다. 의대는 좀 힘들 것 같은데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했다면 조금 방향을 틀어서 '수의사'가 되는 식이다. 꿈은 이렇게 결정된다.








내가 절박한 심정으로 재수, 삼수를 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이 유행이었다.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간절히 원하면 끌어당김의 법칙에 의해 꿈이 이루어진다.'


<시크릿> 책의 내용이다. 처음에 내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간에, 어쨌든 정말 의대에 합격하려면 죽을 만큼 공부를 해야 한다. 그 정도로 공부를 하려면 나 스스로 의대를 간절히 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왜 내가 의사가 되고 싶은지, 의사가 되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을지 상상해 보았다. 실제로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수술대에서 수술을 하는 모습 등을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면서 얼마나 좋을지 상상도 해보았다. 좀더 가까운 미래에는 의대생이 되어서 대학 캠퍼스를 누비면 얼마나 행복할지 떠올려 보기도 했다.


왜 내가 의대에 지원하게 되었는지, 숭고한(?) 이유도 생각해 본다. 멋진 의사가 되어서 힘든 사람을 돕고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한다. 이것은 나중에 면접 대비를 할 때는 실질적으로 중요해진다.


그때는 너무나 의대생이 되고 싶으니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았다. 공부 자극을 하는 영상과 책도 찾아보고 하루에 17시간씩 공부했다는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인생 역전 스토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 인생도 역전시키고 싶어서 그들을 따라했다.


나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의대에 가고 싶은 학생들은 저마다 <@@의대 @@학번> 이런 식으로 책상에도 붙여놓고, SNS에도 써놓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결국 내가 의대를 가겠다고 한 결심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봉사활동에 다녀온 것을 강조하더라도, TV 드라마나 책을 통해 의사에 대한 로망을 가졌다 하더라도, 어려서부터 장래희망을 '의사'로 적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내가 결정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따져 보면 결국 나의 의지가 아니라 '수능 성적 배치표'이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대학과 학과가 수능 성적 배치표에 반영된다. 1등부터 꼴등까지 나열해 놓고 몇 등까지는 의대, 몇 등까지는 어디, 이런 식으로 자른다. 상위권 성적인 학생들은 대개 고민해 보기도 전에 의사라는 꿈을 주입받는다. 그 다음에는 정말로 의사가 멋있어 보이고, 의대를 목표로 하게 된다. 왜 내가 의사가 되고 싶은지, 그 이유는 나중에 찾는다. 먼저 꿈이 정해지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나는 나의 꿈을 내 스스로 정했고, 간절히 원하는 줄 알았다. 아마 이것은 일부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사실과 거짓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따질 수도 없다. 오랜 시간 의사를 열망하고 인생을 바쳐 왔는데, 그 꿈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중요치 않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나서 깨달았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일부러 하고 싶은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된다. <시크릿> 같은 책을 읽으면서 간절히 원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내가 원하기 전에 이미 내 가슴이 미친 듯이 뛴다. 몇 날 며칠 밤을 새면서 관련 책을 읽어도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다. 나는 스티브 잡스 같은 사업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생 때는 학교 책상에 앉아서 사회를 경험해볼 기회가 없다. 그래서 그때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결국 나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허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나의 꿈이라고 철저하게 믿고 살아왔던 것이다.




의사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대학이 수능 성적표에 따라 배분된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고민도 해보기 전에, 배치표 성적을 보고 자신이 합격할 수 있는 대학 중에서 적당히 전공을 정한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꿈을 조정하고 인생도 결정한다. 그 다음에 그 일을 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


이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생각해 보기도 전에 수능 성적 배치표에 의해 인생이 결정되는 삶을 살고 싶은가?


이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그리고 이로 인한 피해는 우리 모두가 입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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