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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호 Dec 20. 2020

조기유학과 귀국 결정

유학 생활에서 배운 것은 영어가 아니라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이었다.

내가 중학생이었던 시절, 우리 가족은 큰 결단 두 가지를 내렸다.


첫 번째는 나와 내 동생의 교육을 위해 해외 유학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내 동생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어른이 되어 뇌가 굳으면 외국어를 익히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언어가 발달하는 어린 나이에 유학을 보내면 영어를 거의 모국어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조기 유학이라는 말이 생겼다.


교육을 위해 우리 가족은 떨어져 살기로 했다. 아버지가 한국에 남고, 어머니는 아들 둘을 데리고 셋이서 호주로 떠났다. 호주에서도 시드니나 맬버른 같은 유명한 도시는 한국인이 많아 영어를 쓰지 않을 테니, 처음부터 한국인이 아예 없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브리스번에서도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1시간 정도 가야 하는 조그만 도시, 록햄프턴이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정말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실제로 어른들은 해외에 나가면 영어를 잘 못 한다. 공부하듯이 영어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아이들은 6개월만 지나면 자연스레 친구들과 영어로 대화한다고 한다. 실제로 내 동생은 초등학생 때 호주에 가게 되었는데 확실히 금방 적응하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조금 힘들었겠지만 금방 영어로 말을 잘하게 되고 친구들도 사귀었다. 나는 낯을 좀 가려서 못했는데 동생을 곧잘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나이였던 나는 동생보다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던 것 같다. 꽤 오랫동안 혼자서 식사를 했던 것 같다. 외국 친구들은 남자든 여자든 먹는 양이 꽤 많아서 점심 때 피자 한 판을 시켜서 혼자서 다 먹는다. 나는 매일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것이 싫어했다. 내향적인 성격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영어 실력은 학교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늘었다. 물론 의식적으로 따로 영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영어 발음이나 표현 등은 외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월등히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이 한국어를 세련되고 교양있게 구사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그것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다만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바뀐 것은 '생각을 영어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로 먼저 생각한 뒤 표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떤 뜻을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때 바로 영어로 표현이 떠오르게 된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도 자연스럽게 영어가 가능해진다.


유학 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로 수능 때까지 영어가 걸림돌이 된 적은 없었다. 따로 전혀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늘 좋은 성적이 나왔다.







나는 중학생 때 유학 생활을 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유학을 가게 되었던, 나를 둘러싼 환경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기 유학은 아직 우리나라가 못 사는 나라일 때나 필요한 것이다. 영어만으로도 직업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하나 윗세대의 어른들은 영어를 잘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아는 어떤 분도 가난한 집에 태어나 썩 좋지 않은 학벌을 가졌지만 영어 실력이 뛰어난 분이었다. 낮은 학벌 때문에 대기업에는 다 떨어졌지만, 일반 회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중요한 인생의 순간마다 영어 실력으로 기회를 잡았다. 결국 세계적 기업의 한국 지사의 임원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세상이었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동시통역사가 되기 위한 학원은 항상 제일 빨리 마감되는 인기 전공이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영어를 못해서 한스러웠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영향으로 인해 나와 동생은 어린 시절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기 유학은 선행학습과 성격이 똑같다. 대학 잘 가고, 취업 잘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 어릴 때부터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내가 외국 생활에서 배운 것은 영어가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더 넓은 세상을 보는 시야였다. 나중에 입시 공부와 의학 공부를 할 때에도 호주에서의 경험은 큰 도움이 되었다. 공부는 나의 발전과 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지, 입시와 성적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태도와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관 등에 영향을 미친다.


가장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 중 하나가 예체능 수업 시간이었다. 내가 유학을 가기 전이나, 다녀온 후에나 마찬가지로 한국의 체육 시간은 남자들에게 그저 공 차고 노는 시간이다. 그러다가 성적을 평가하기 위해 구색 맞추기 식으로 체력장을 한다. 시험 직전에 1~2시간 정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서는 시험에 나올 페이지 수를 불러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진심으로 체육 시간에 임하는 선생님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수업을 제대로 하고 싶더라도 분위기상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호주 체육 수업은 달랐다. 체육 시간(= P.E. Physical Education)이 굉장히 유익하고 짜임새 있었다. 성적을 평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수업이 아니었다. 나는 한국에 있었더라면 애초에 경험도 해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여러 종류의 스포츠를 짧게나마 직접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종목의 스포츠를 하더라도 정해진 교육 목표에 따라 짜임새 있게 이뤄진다. 예를 들어 축구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그저 공 주고 '알아서 뛰놀아!'라고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누구나 드리볼을 경험해 본다. 그리고 골고루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의 역할을 돌아가면서 해본다. 프리킥이나 골키퍼 등도 어떤 원리가 있는지 설명을 듣고 실제로 해볼 수 있다. 축구 뿐만이 아니라 다른 스포츠도 비슷한 방식으로 해볼 수 있다.


특히 호주는 골프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는 골프가 매우 돈이 많이 드는 고급 취미이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그냥 동네 애들도 가서 칠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하고 접근성도 높다. 나는 학교 체육 수업 시간에 다같이 인근 골프장으로 (골프 연습장이 아니라 진짜 골프장이다!)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물론 바로 필드를 도는 것은 아니고 골프장에 딸려 있는 골프 연습장에서 먼저 연습을 시켰다. 간단히 골프채를 휘두르는 방법을 알려주고, 한 명씩 연습용 골프채로 공을 쳐볼 수 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14~15살 정도일 때였다.


나는 이중에서도 축구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학교 축구 동아리에 가입했다. 매주 학교 수업이 끝나면 따로 훈련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1년 내내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다른 학교 축구 동아리들과의 시합이 있었다. 남녀의 구분 없이 누구나 축구가 하고 싶으면 선수가 될 수 있다. 훈련도 똑같이 받고, 축구화를 비롯한 장비들도 똑같이 구입해서 착용한다. 능력에 따라 포지션을 배분하고, 공평하게 바꾸기도 한다. 나는 결국 수비수가 되었고 비록 실력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학교 팀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할 수 있었다. 물론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꼭 있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 골을 넣는 사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만 경기에서 이길 수 있다. 경기는 토너먼트 식으로 진행되는데 1년마다 1등을 가린다. 내가 속한 팀은 그 해에 2등을 했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역할을 다했기 때문에 그만큼 땀흘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아주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여기서 내가 느낀 가장 극명한 차이는 바로 다음과 같다. 호주 체육 시간에서 나는 다양한 스포츠의 즐거움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 이 스포츠는 이런 게 매력이구나!'

'나는 축구에서 공격수보다는 수비수의 역할이 더 어울리는구나!'

등등..


세상에는 즐길 수 있는 운동이 굉장히 많고, 각각의 매력이 있다. 그것을 느껴보는 것이 가장 큰 공부다. 어쩌면 그중 하나가 나의 직업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해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즐기는 스포츠가 하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삶의 기쁨이다. 나는 학교에서 그런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호주에서의 체육 시간이 특별했던 것처럼, 다른 과목들도 마찬가지였다. 수학은 계산을 빨리 하고 답을 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수학적으로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목표다. 그래서 필요하면 언제든 계산기를 꺼내 쓸 수 있고, 수학에서도 특별히 관심있는 파트가 있다면 선생님이 따로 내가 더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호주에서의 국어 시간(나에겐 영어 시간)도 같았다. 문학 시간에는 문학 작품을 분석해서 정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소설 한 작품을 놓고 오랜 시간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을 배웠다. 실제로 거의 두 달 동안 소설 단 한 작품만을 가지고 수업을 진행했었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전쟁 중인 아랍 국가의 한 소녀가 쓴 일기로 된 작품이었다. 같이 소설을 읽고 감상을 나누고 토론을 하였다. 과제로 소설 내용을 소개하는 매거진 기사를 써보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매거진 편집자가 되어볼 수 있었다.


논문을 써보는 시간에는 시작 전에 선생님이 논문이란 글의 특성과 표절을 하면 안되는 이유 등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곤 또 거의 한두 달 동안은 논리적인 글쓰기가 진행된다. 초안을 만들면 선생님이 피드백을 해준다. 그러면 다시 2차 수정안(draft)를 낸다. 또 피드백을 받고 3차 수정안을 낸다. 그 다음엔 최종안을 제출한다. 최종안의 수준도 평가 기준이 되지만, 초안을 만들기 전과 얼마나 2차, 3차 수정안을 열심히 했는가 하는 과정도 전반적으로 모두 평가받게 된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호주에서의 수업 시간과 많이 달랐다.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은커녕, 매시간 빡빡하게 시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작가의 의도며 기출 문제며.. 그런 것만 중요했다. 수행평가도 학생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선생님이 과제를 내주면 학생들은 알아서 해와야 했다. 선생님은 결과물을 평가해서 학생들을 등급으로 나누고, 잘하는 학생은 치켜세우고 못하는 학생은 철저히 깎아내렸다. 학생들이 수행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결국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누가 누가 비싼 돈을 내고서라도 더 잘 가르치는 학원/과외 선생님을 찾아서 친구들을 짓밟고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교육 수준은 딱 여기까지다. 한국의 학교는 성장하고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위너가 될 사람과 루저가 될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도축장일 뿐이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우수한 성적을 받았기에 그런 차별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노력한 만큼 정당하게 얻은 댓가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공부를 잘해서 특혜를 받든, 공부를 못해서 부당한 차별을 받든, 결국 도축장에서 등급을 받는 존재이다. 우여곡절 끝에 의대를 자퇴하고 난 다음에서야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유학 시절 당시의 나는 어렸다.


1년 반 동안의 외국 생활이 끝나갈 때, 어머니는 나의 의견을 물었다. 호주에 혼자 남아서 공부하면 호주 의대는 좀더 들어가기 쉽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치열한 입시 전쟁이 시작된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직접 선택해라.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했다. 호주에 남으면 한국에서보다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공부에 대한 불필요한 스트레스도 덜 받고 먹고사는 문제도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군대 문제도 어쩌면 해결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돌아오기로 했다. 먼저 한국인으로서 살아가 보고 싶었다.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평생 살 것이 아니라면 한국을 좀 더 경험하고 싶었다. 호주 학생들은 죽어라 공부하지 않는다. 그런데 새벽 1~2시까지 매일 치열하게 공부한다는 입시 경쟁을 직접 겪어보고 싶었다. 인생에서 한 번쯤은 그토록 열심히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도피하고 싶지 않았다. 외국 경험은 1~2년 정도로 충분하다.


군대 문제는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한 말이 떠올랐다.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도, 전쟁이 나면 싸우기 위해 모인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쟁이 나면 해외로 도피할 생각부터 한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군대 문제 때문에 호주에 남아 영주권을 얻겠다면 그것은 비겁한 일이라 생각했다. 꼭 가야 한다면 마땅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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