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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호 Dec 27. 2020

실존하는 스카이캐슬, 대치동

조기 유학에 이어서, 우리 가족의 두 번째 결단은 대치동으로의 이사였다.


어머니, 동생과 나 셋이서 호주에 유학을 가 있는 동안, 한국에 있던 우리집은 대치동으로 이사를 갔다. 우리가 없는 동안 아버지 혼자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원래 살던 여의도의 집이 아닌, 대치동의 새로운 집으로 돌아왔다. 말로만 듣던 처음 가본 대치동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전국에서 사교육 열풍이 가장 거세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중학생 시절을 1년 반 동안 유학 생활을 하고 연이어 한국에서도 이사를 하게 되니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떨리고 설레기도 했지만 낯설고 두렵기도 했다. 유학을 가기 전에는 나름 성적이 좋은 상위권 학생이었고, 유학 시절에는 워낙 한국 학생들이 외국에 나가면 적당히만 해도 어지간히 좋은 성적을 받는다. 하지만 이제 갑자기 대치동으로 이사를 와서 쉽게 적응할 수 있을까? 1년 반 동안이나 한국의 학교 진도에 뒤처져 있는 데다가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되어 입시 공부도 시작될 것이었다. 예전 친구들이 있는 원래 다니던 학교로 돌아와도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고민인데 전국에서 사교육 경쟁이 가장 치열하다는 곳에서 잘 버틸 수 있을지 두려웠다. 이런 감정들이 내가 대치동에 오면서 느낀 첫인상이었다.






대치동은 어떤 곳일까?


한티역 근처에서부터 거리를 따라 쭉 이어지는 대치동 학원가에는 학원들이 빼곡하다. 소형 보습학원에서부터 한 번에 200~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강의실까지 다양한 학원들이 있다. 유명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서만 볼 수 있었던 소위 '스타 강사' 선생님들의 현장 강의를 직접 듣고 따로 입시 컨설팅을 받을 수도 있다. 반대로 인터넷에 드러나지 않는 일종의 숨은(?) 재야의 고수 같은 선생님들도 있다. 이분들은 인강을 찍지 않아서 전국적으로 유명하진 않은데 현장 강의에서는 150~200명 정도가 들어가는 강의실이 항상 꽉 찬다. 수강생 한 명이 내는 강의료와 하루에 돌아가는 수업 수 등을 어림짐작 해서 이 선생님들의 월 수입을 계산해보면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온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대기업에 다니는 고소득자가 받는 연봉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수능이 끝난 후 대학 논술고사 시즌이 되면 이공계의 경우 수학과 과학 논술 학원이 풀타임으로 돌아간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대형 학원의 경우 오전/오후반으로 나눠서 과학/수학이 교대로 돌아간다. 예를 들면 과학을 오전에 듣고 수학을 오후에 듣는 반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오전 과학반도 A반과 B반으로 나뉜다. A반은 2시간 동안 과학 강의를 먼저 듣고 나머지 2시간 동안 관련 주제로 논술을 써본다. B반은 먼저 논술을 써본 뒤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오후에 수학반으로 이동해서 똑같이 반복한다. 과학 4시간, 수학 4시간씩 하루에 총 8시간 논술 수업이 진행된다. 각 반은 보통 수백 명이 동시에 듣는다. 대략 200명이라고 가정하면 총 4팀이니까 800명이 동시에 수강하게 된다. 보통 수능 끝나고 수시 논술고사까지 1~2주 정도 시간이 있다고 하면 매일 수업이 이어진다. 정시 논술은 1월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12월 내내 수업이 진행된다고 보면 된다. 학원마다 시스템과 수강생이 다 다르겠지만, 내가 본 학원을 기준으로하면 그렇다. 논술 수업의 수강료는 일반 수강료보다 비싼 편이고 하루 종일 돌아가기 때문에 여기에 지출되는 사교육비는 대략 예측이 가능할 것이다.



대치동 과외 시장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학원가와는 반대로 1:1 혹은 소규모 그룹과외는 시간당 단가가 높다. 대치동의 과외를 다 경험해본 것은 아니지만 직접 경험한 것과 전해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쉽게 비유하기 위해 미용실을 예를 들어 보겠다. 보통 펌을 하면 얼마나 들까? 어떤 약을 쓰는가와 미용실의 인지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동네 미용실에서 펌을 하면 대략 3~5만 원 사이, 좀 좋은 약을 쓰면 7만 원 정도가 나온다. 물론 집에서 약을 사서 직접 하면 더 싸게도 할 수 있다. 이제 좀더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미용실, 강남이나 청담동의 유명한 미용실에 가서 펌을 하면 어떨까? 보통 한 번 펌을 하는데 최소 10만 원 이상, 대략 15~20만 원 사이로 나온다. 여러 가지 옵션을 추가하면 30만 원까지 올라간다. 이 정도면 일반적으로 매우 고가의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이것보다 더 비싼 헤어 시술도 있을까? 있다. 여기서부터는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고, 부르는 게 값이 된다. 업계에서 알아주는 실력자가 한다든가, 청담동의 최고급 샵에서 한다든가 하면 50만 원 이상, 100만 원이 되기도 한다.


과외 시장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시급으로 계산했을 때 대학생 과외가 보통 2만원 내외, 전문 과외 선생님이 5만원 내외까지 올라간다. 이름난 실력있는 선생님이라면 10만원까지도 받을 수 있다. 이 정도면 굉장히 고가의 과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상으로 올라가면 역시 부르는 게 값이 된다. 형태도 다양해진다. 극소수의 학생들이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최적화된 특별한 방식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과외가 진화하다 보면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 나오는 것 같은 고도화된 기술들이 나올 수도 있다. 학원 시장과 마찬가지로 수시/정시 논술 시즌에만 특화된 1:1 초고가의 과외도 있다.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유명 재수학원 강사님들은 그 학원 타이틀을 달고 따로 1:1 고가 과외를 하기도 한다. 학원에서 버는 강의료는 월급일 뿐이고 이렇게 과외 수입이 훨씬 더 큰 주수입일 것이다.



사교육이 고도로 발달, 분화된 곳


대치동 사교육 시장에 대해서 이 글에 다 담지 못한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이곳의 사교육은 고도로 발달, 분화되어 있다. 이곳을 비유하자면 사람들이 모임 장소로 강남역이나 홍대를 가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집 근처에도 식당은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하지만 친구들을 만날 때 강남역이나 홍대에서 만나면 훨씬 더 다양한 식당과 메뉴를 정할 수 있고, 동네에는 없는 예쁘고 특색있는 카페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강남역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고 사람들은 조금 비싸더라도 좋은 음식과 분위기에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 그래서 식당이나 가게 사장님들은 다양한 고객의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과감한 도전을 해볼 수 있는 동기가 생긴다.


대치동도 마찬가지다. 대치동에는 교육비가 조금 비싸더라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 부모님들이 모여 있다. 그렇다 보니 부모와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학원과 과외 방식들이 생겨날 수 있다. 친구를 만날 때 집 근처 식당을 가도 되지만 일부러 강남역을 찾아가는 것처럼, 집 앞에도 학원이 많지만 학생들이 일부러 대치동까지 학원을 찾아오는 것이다. 물론 대치동 외에도 사교육 중심지들이 곳곳에 있다.


사교육 과열이 바람직한가, 바람직하지 않은가 하는 가치 판단과는 별개로 대치동 학원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경제 논리에 의한 것이다. 어쨌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제공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입시 코디는 존재하는가? 이런 의문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드라마에서 누군가 고액의 입시 코디를 상상해낼 수 있었다면, 이미 그러한 방식의 과외는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마도 드라마에서 나온 것보다 현실은 더 다양하고 더 복잡할 것이다. 드라마라는 것이 원래 현실의 한 단면만을 포착해서 상상력을 더해 스토리를 꾸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드라마에 나온 것과 같은 사교육은 일반적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강남역에서 가장 비싸고 사치스러운 식당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서 식사를 해본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대부분은 그 식당의 이름 정도는 들어봤어도 가볼 엄두도 내기 힘들다. 소수의 사람들이 한 번 정도는 이용해 봤을 것이고,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주 이용할 것이다. 대치동 과외 시장도 비슷하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대다수는 다른 지역과 비슷하거나 다소 비싼 과외를 접해봤을 것이고, <스카이 캐슬>과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공부만 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어쩌다가 잠깐 접해봤을 정도이고, 극소수만이 입소문에 의해 이용했을 것이다.






대치동으로 이사를 가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발전한 단계의 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살떨리게 무서운 무한 경쟁이 매일 일어나고 있는 대치동에 내가 이사를 온 것은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였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 다행히도 한 학기가 남아 있었다. 유학을 갔다 오면 1년을 꿇어서 한 학년 밑으로 내려가는 경우도 많았는데,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원래 나이대로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 교육 과정에서 1년 반의 공백이 생긴 채로 학교에 돌아가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치른 중간고사 성적은 물론 엉망이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중간고사였다. 하지만 나에겐 그 다음이 기회였다. 사실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학교 수업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곧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기 때문이다. 3학년들은 마지막 학기 중간고사까지는 열심히 하지만, 기말고사는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수업도 대충 이뤄진다. 다른 학년에 비해 기말고사가 빨리 끝나고 나면 방학까지 남은 기간 동안은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 아침에 선생님이 출석체크만 하고 나간다. 그러면 교실에서 하루 종일 영화, 드라마를 틀어놓고 마음껏 논다. 반 친구들이 합의해서 당시 제일 유명한 미국 드라마(당시에는 프리즌 브레이크가 유행할 때였다)를 정주행하기도 했다.


나는 반대로 이 기간 동안 공부가 가장 재미있었다. 친구들이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교실 가장 모퉁이라서 TV 화면이 잘 안보이는 인기 없는 자리에 앉아서 이어폰을 끼고 혼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 외국에 있었던 1년 반은 거의 놀다시피 했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오면 제대로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한국에서 밀린 진도를 채워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대치동 친구들 사이에서 밀리지 않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때 공부가 재밌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생 마지막 순간에 모든 시험이 다 끝나고, 아직 고등학생은 아닌 시절이었다. 시험이나 점수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학문을 위한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물론 학원을 아니고 과외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코앞에 닥친 시험이 없었다. 그래서 마음껏 문학 작품을 감상하고 분석했고 수학도 한 문제를 놓고 답이 나올 때까지 고민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책을 읽어둬야겠다 싶어서 청소년 필독서나 서울대 필독서 목록에 있는 책들을 무작정 사서 읽기도 했다. 2학기 마지막 시험이 대략 11월 말, 12월 초에 끝나니까 최소 3달 동안은 하고싶은 '진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 시기가 시험에서 해방된 마지막 놀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곧 고등학생이 되면 입시 지옥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긴 하지만 이것 또한 시험을 위한 공부의 폐해일 것이다.


고등학교 입학 전인 2월 말이 되어서 반 배치고사라는 시험을 봤다. 이 시험 성적에 따라 반이 나뉘어진다. 나는 이 시험에서 전교 7등을 했고, 몇 달 후 이어서 치른 첫 중간고사에서 전교 4등을 했다. 일반적으로 고1 첫 중간고사는 대입 수험생으로서 치르는 첫 시험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소위 강남 8학군에 속하는 우리 학교는 매년 서울대는 10명 내외, 연고대는 수십 명, 의치한의대도 10명 이상이 합격한다. 큰 이변이 없다면 나는 상위권 의대에 안정적으로 합격할 수 있는 성적이었다.


이러한 성적을 내는 데 있어서 중학교 마지막 시절에 보낸 짧은 몇 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두 이것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이 시절에 마음껏 시행착오를 하며 공부한 기간이 없었다면 이후 3년 동안은 시험 기간에 끌려다니기만 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을 확률이 높다.


처음에 낯설고 두려운 첫인상을 느끼며 대치동으로 이사왔지만 다행히 운이 좋아서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사교육이 가장 활발한 대치동에서 오히려 나는 그전보다 학원을 적게 다니면서 성적은 더 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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