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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호 Dec 28. 2020

맹목성이라는 괴물에 잡아먹혀버린 학교

앞장에서 선행학습, 조기유학, 대치동과 사교육 열풍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맹목성이다. '맹목'은 장님의 눈을 말한다. 무언가를 맹신한다고 하면 '덮어놓고 믿다'는 뜻이고,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한다고 하면 '덮어놓고 한다'는 말이다. 합리적으로 사리분별을 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이 희생되고 있을 때 맹목적이라고 한다.



교육의 맹목성


교육에도 맹목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무조건) 시험에서 만점(=1등급)을 받아라.

2. (무조건) 좋은 대학에 가라.

3. (무조건) 의대, 법대를 가라.


(결론) 그러면 행복해지리라.



여기에는 다른 무언가가 낄 틈이 없다. 전국의 학생들에게 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다. 오직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목표이다.


실제로 내가 처음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신입생이 되어 새로 산 교복을 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기 위해 학교로 갔다. 앞으로 어떤 학교 생활이 펼쳐질지, 어떤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될지, 어떤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 될지 등등 궁금한 것들도 많고 설레는 것들도 많았다. 그런데 전교생이 처음 한 자리에 모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우리가 들은 말은 다음과 같았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대학 입시생이다. 얼마 전에 학교가 주5일제로 바뀌면서 토요일에 동아리 활동을 한다 뭐다 하는데, 쓸데없이 동아리 활동하면서 놀 생각하지 마라. 좋은 대학 못 가면 다 소용없는 짓이다. 정신 차리고 지금부터 공부해라."


대략 이런 취지의 말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는 주5일제로 가는 전환기였다. 옛날에는 월화수목금토 모두 학교를 갔다. 그러다가 격주로 토요일에 쉬는 것으로 되었다가, 내가 고등학교에 갈 때쯤에는 완전히 토요일은 학교를 안 나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이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위에는 안 썼지만 이날 오리엔테이션에서 우리 학교가 매년 서울대에 몇 명씩 합격하며, 작년에 우리 선배들은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서울대를 많이 못 갔다면서, 주말에 쉬게 해줬더니 동아리 활동 같은 거나 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이것이 학교 교육의 맹목성이다. 학교 현장은 '수능'이라는 맹목성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3년 동안 그 어떤 활동도 수능 점수와 대학 입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학생으로서 칭찬받을 일이고, 아무리 의미가 있다고 해도 수능과 대입에 해를 끼치면 학생으로서 할 도리를 다하지 않은 것이 된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 마지막 화에서 고3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들어와서 이런 말을 했었다.


"니들은 인간이기 이전에 학생이야. 고3이라고. 대학갈 생각을 해야지 학교를 관둬? 스카이 못가면 뭐라고? 사람대접 못받는다! 내 눈엔 다 보여. 누가 출세하고 성공할지, 누가 빌빌거리고 쓰레기처럼 살지!"


나는 이 장면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고등학생 시절에는 공부가 아닌 모든 일이 정신나간 짓이라는 말을 세뇌당할 만큼 들어야 했다.


그 결과는 물론 참담하다. 오직 수능 점수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만들면 다른 가치들을 경시하는 기형적인 성향이 생길 수 있다.






맹목성의 폐해


첫 번째로 수능에 반영되는 과목과 그렇지 않은 과목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생긴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이 되면 음악, 미술, 체육 시간은 없는 시간이나 마찬가지이다. 1학년 때만 형식적으로 수업을 진행할 뿐이고 2학년, 3학년이 되면 아예 자습 시간으로 바뀌거나 없어진다. 음악, 미술, 체육이 인생에서 가치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다. 단지 수능에서 평가하지 않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수능 선택과목이 어떻게 바뀌냐에 따라 학교 선생님들의 지위와 학원 선생님들의 수업 단가가 정해지기도 한다. 이과의 경우 물리, 화학, 생물, 지학 4개의 선택과목이 있다. 하지만 이중 3개만 반영하느냐, 2개만 반영하느냐에 따라 인기과목이 나뉘어지고 인기가 없는 과목의 선생님의 경우엔 퇴직 위기가 온다. 철저히 돈에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학원가에서는 아예 폐강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자신의 꿈을 위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공부할 수 있는 권리가 박탈된다. 그보다는 수능에서 유리한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과목을 선택하도록 압박을 받게 된다.


다른 수업 시간도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 없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 시간에 출석을 위해 마지못해 참여할 뿐이지, 정말로 해당 수업 시간에 인생의 중요한 무언가를 배우고자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대학생들은 원하는 과목을 수강 신청해서 들을 수 있는데, 왜 고등학생들에겐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왜 고등학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권리가 없을까? 그렇게 해야만 선생님들이 자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고등학생들에게 약간의 수업 자율권을 준다 하더라도 현재의 고등학교 교육 시스템은 즉각 붕괴해 버릴 것이다. 학생들을 강제로 한 반에 분배해서 정해진 수업을 강제로 듣게 해야만 선생님들이 수업을 유지할 수 있다.


선생님들은 이 헤게모니를 절대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선생님들은 이걸 교권이라고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심각한 자유의 침해이다.


대신 학생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 수업 시간에는 다른 문제집을 펴놓고 몰래 자습을 한다. 사실 선생님도 알고 학생도 알고 있지만 묵인할 뿐이다. 문학 시간에 못다한 밀린 영어 숙제를 하고, 영어 시간에는 수학 학원 숙제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것이 나의 수능 성적에 더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2020년에는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유행을 하면서 일시적으로 모든 수업이 비대면 화상 강의로 전환되었다. 학생들은 왜 굳이 인터넷 스타강사들보다 훨씬 더 못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들의 강의를 인터넷으로 들어야 할까? 게다가 학교 수업은 1등부터 꼴등까지 똑같은 강의를 강제로 듣게 한다. 이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가?


분명 이 모든 것이 학생을 위해서는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는 학생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현재의 학교는 학생이 아니라 선생님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제도로 만들어져 있다. 단지 전국의 학생들을 임의로 평가하고 등급을 나누어서 위너와 루저를 만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두 번째는 학생회 활동과 동아리 활동이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 외에 민주 사회 시민으로 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학급 회장과 학생회 임원을 선출하는 선거와 대의원을 뽑는 과정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민주주의 교육이다. 한 나라로 치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까. 으레 성적이 가장 좋은 친구들이 학급 회장을 하게 된다. 학생회 임원도 성적순으로 뽑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생들의 자치 활동 조직인 학생회가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도 역시 간단하다. 대학 입시에서 학생회 활동이나 동아리 활동을 한 이력이 있어야 자소서에 한 줄 쓸 말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그랬다. 학급 회장 선거는 선생님의 재량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거의 원칙을 정한다. 어떤 반은 성적이 좋은 학생이 거의 학급 회장에 내정되어 있다. 어떤 반은 선생님이 정식 민주주의 절차를 거쳐서 뽑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미 형식적인 절차에 익숙해져버린 학생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욱 관심이 없어진다. 고3이 되었을 때는 선거를 할 필요도 없이 그냥 반 1등이 회장, 반 2등과 3등이 부회장이 되는 것으로 1분 만에 회장 선거가 끝나 버렸다.


학생회 임원 선출은 더욱 심각하다. 전교 학생 회장의 경우는 정말로 리더십이 필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설령 대학 입시에 도움이 되기 위해 했다 하더라도 선거 과정을 치열할 수 있다. 문제는 학생회 임원을 뽑는 과정이다. 당시 우리 학교는 학생 회장이 단일 후보 출마로 당선되었었다. 그 후에 학생회 임원 선출은 학생회장의 권한이어야 하지만, 놀랍게도 학생회 임원은 선생님들이 면접을 봐서 뽑았다. 학생회 임원 면접을 볼 때 선생님들이 앞줄에 앉아서 질문을 하고, 학생회장과 부회장은 뒤에 앉아서 지켜보기만 했다. 나중에 보니 임원으로 뽑힌 학생들 대부분은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장관들을 직접 뽑지 못하고, 일본인이 와서 대신 뽑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학생회 임원을 뽑는 학교가 굉장히 많다.


학생들은 이런 것들을 보며 무엇을 배울까? 학교는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의식을 키워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온갖 편법과 아부 아첨하는 법, 형식뿐인 규칙을 가르치고 있다.


동아리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대학 가는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동아리부터 순서대로 찬다고 한다. 특히 의대 진학에 도움이 되는 동아리는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동아리 면접까지 보는데, 면접에 합격하기 위해 따로 과외를 받아가야 할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자소서에 리더십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동아리 회장이 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학생들은 이렇게 점수와 입시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다른 곳이 아닌 바로 학교에서 말이다.








학교 수업과 학생회 및 동아리 활동 등이 모두 수능이라는 맹목성에 빠져 있다. 물론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이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또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연애이다. 입시 경쟁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죄책감을 느끼며 자라야 했다. 실제로 내 친구들 중에는 비밀로 연애를 하다가 부모님한테 걸려서 혼나고 강제로 이별을 당한 사례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내내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2학년 때는 전국 각 학교의 임원들이 모인 연합체인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약칭 한고학연)'에 우리 학교 대표로 참가해서 활동했다. 당시의 화제는 두발 자유, 과도한 체벌 금지, 학생회의 제자리 찾기 등이었다. 이를 위해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도 하고 언론보도도 했다. 새로 뽑힌 학생회 임원들을 모아서 노하우를 교육하기도 했다. 제일 수능 공부로 바빠야 했던 3학년 때는 한고학연 의장이 되어서 바쁘게 돌아다녔다. 나에게는 오직 고등학생 때만 할 수 있는 중요한 활동이었기에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1년이 지나 어른이 되면 더 이상 고등학생 신분으로 고등학생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조금씩 떨어지는 내 성적 걱정에 노심초사하셨고, 대부분 선생님들은 한심한 학생으로 바라보셨을 것이다. 나는 이때 한고학연 활동을 했던 경험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지금까지도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만약 그때 어른들의 말을 듣고 한고학연 활동을 포기했다면 성적은 얻었겠지만 인생의 훨씬 중요한 것들은 배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대학 입학을 위한 수능 공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내 인생에 도움이 된다면 선택해서 공부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맹목성'에 있다. 마치 눈을 가린 채 앞으로 직진만 하는 사람처럼 전국의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이 오직 SKY대학, 의대에만 목매달고 있다. 마치 합격하지 못하면 인생을 실패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제쳐놓고 점수에만 신경을 쓴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의 패배이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이들은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원하는 결과를 얻은 이들도 대학 합격은 얻었지만 그 댓가로 인생의 중요한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같은 패턴이 인생에서 반복된다.


앞에서 어른들은 학생들에게 맹목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강요했었다.


1. (무조건) 시험에서 만점(=1등급)을 받아라.

2. (무조건) 좋은 대학에 가라.

3. (무조건) 의대, 법대를 가라.


→ '이것을 이룰 때까지는 행복을 유예하라. 그러면 행복해지리라.'


이 말은 사실일까? 결코 아니다. 대학에 가면 대상만 다르고 똑같은 맹목성이 반복된다.


4. (무조건) 스펙을 쌓아라.

5. (무조건) 대기업에 취업해라.

6. (무조건) 국가고시, 7급/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라.


→ '이것을 이룰 때까지는 행복을 유예하라. 그러면 행복해지리라.'


이 말은 사실일까? 이젠 예상했겠지만,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다.


7. (무조건) 더 높이 승진해라, 연봉이 더 높은 곳으로 가라.

8. (무조건) 좋은 집안의 사람과 결혼해라.

9. (무조건) 좋은 아파트를 사라.


→ '이것을 이룰 때까지는 행복을 유예하라. 그러면 행복해지리라.'



물론 앞으로도 절대로 '행복해지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미 습관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죽는 순간까지 다음 생의 행복을 위해 이생을 불행히 보내게 될 것이다.


최소한 당신이 이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의대를 자퇴하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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