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bracing the Absence_07 - 우드랜드 공원묘지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여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
인간은 죽음이 꼭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삶과 죽음이 자연의 당연한 이치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죽음이 반드시 끝은 아니며 새로운 삶으로 연결되는 영속적 과정임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묘한 위안을 선사해 줍니다.
곧고 거대한 교목들 아래 자그마한 묘비들이 규칙 없이 자유분방하게 놓여있는 풍경은,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말해줍니다.
이곳에 서면, 작은 존재인 인간이 더 큰 존재인 자연으로 회귀하여 그것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스톡홀름 도심에서 남쪽으로 약 7km 정도 떨어진 곳, 전철로 대략 30분 정도의 거리에 우드랜드 공원묘지가 있습니다. 역에서 내려서 돌담을 따라 몇 분만 걸으면, 금세 묘지의 입구에 다다르게 됩니다. 묘지들은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에 불편한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이곳의 우수한 접근성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20세기 이후에 조성된 100헥타르(약 30만 평)가 넘는 거대한 묘지가, 도심에 이토록 근접해 있다니요.
공원 정문으로 들어가서 불규칙한 형태의 판석이 깔린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저 멀리 거대한 십자가가 우뚝 서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방문객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향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이라 불리는 이 길의 왼편을 따라 낮은 벽이 경계를 이루고 있고, 그 벽이 끝나는 지점에는 성 십자가 예배당(The Chapel of Holy Cross)의 현관 캐노피가 보입니다. 오른편으로는 기억의 언덕(Hill of Remembrance)의 완만한 능선이 강인하고도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공원묘지 내부에 들어섰지만, 실제 무덤을 보게 되는 것은 한참을 걷고 나서입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십자가는 1939년 세워진 것으로 신고전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발트해위의 십자가(Cross on the Baltic Sea)>에서 일부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프리드리히의 다른 풍경화들처럼 고독과 경건함이 기저에 놓여있는 가운데, 어슴푸레한 빛의 존재가 느껴집니다. 버림받은 세계에 남겨진 희망과 위로로서의 십자가는 우드랜드의 십자가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갑작스러운 인구의 증가를 겪은 스톡홀름 시는 도시의 남쪽에 새로운 묘지를 만들기 위하여 설계 공모전을 개최합니다. 1914년에 열린 공모전에서 에릭 군나르 아스플룬드(Erik Gunnar Asplund)와 시구드 레베렌츠(Sigurd Lewerentz)의 팀이 탈룸(Tallum)이라는 모토로, 52개의 다른 팀을 제치고 1등으로 당선되었습니다. “Tall-“은 스웨덴어로 소나무(pine tree)를 의미하며, 그 뒤에 “-um”이라는 어미를 붙여 "Tallum”이라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아스플룬드와 레베렌츠의 탈룸(Tallum)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콘셉트로 삼았습니다. 묘지로 예정된 광활한 땅에는 원래부터 소나무 숲이 들어서 있었는데, 두 건축가는 기존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은 채로 기존 숲에 좁고 구불구불한 산책로 시스템을 더했습니다.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태고의 숲을 이미지화 한 경관은 오늘날까지도 우드랜드 공원묘지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 숲으로 돌아간다는 생사관은 스웨덴 사람들의 의식에 태고적부터 깊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국토의 70% 이상이 숲으로 덮여있는 스웨덴에서, 숲은 두려움이 대상이라기보다는 삶과 쉼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스웨덴 사람들의 의식에는, 사람은 죽은 후에 숲으로 돌아간다는 생사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드랜드 공원묘지에는 그러한 생사관의 이미지가 눈에 보이는 풍경으로 재현되었습니다.
이곳에 심어진 소나무들은 본래 건축자재로 사용하기 위한 것들로 측면의 가지가 거의 없고 직선으로 곧게 뻗으며 자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곧고 거대한 교목들 아래 자그마한 묘비들이 규칙 없이 자유분방하게 놓여있는 풍경은,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이곳에 서면, 작은 존재인 인간이 더 큰 존재인 자연으로 회귀하여 그것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여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 인간은 죽음이 꼭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삶과 죽음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죽음이 반드시 끝은 아니며 새로운 삶으로 연결되며 영원히 반복되는 과정임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묘한 위안을 선사해 줍니다.
우드랜드 공원묘지에 설치된 묘비들은 조금씩 다른 형태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비슷한 크기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교목들의 곁에 놓여있어서 그런지, 그 존재가 더욱 작고 겸손하게 느껴집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이탈리아 공동묘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이곳에서는 유명인의 무덤에도 화려한 기념비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스위스의 국민배우였던 그레타 가르보의 묘비조차도 아주 작고 소박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모두에게 동일한 크기의 위엄을 허락하는 것은,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스웨덴의 다른 묘지들에서도 일관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25년간 지속된 프로젝트, 그리고 건축가의 기구한 운명
우드랜드 설계공모전에 참가할 당시, 레베렌츠와 아스플룬드는 같은 학교를 졸업한 동기로 30세에 불과한 젊은 건축사였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그들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지, 공모전에서 당선되었을 당시의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드랜드 공원묘지 프로젝트가 완공되기까지는 무려 25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동안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던 당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기에, 건축가들은 여러 차례 그들의 제안서를 간소화하여 새로이 작성해야 했습니다. 1920년대에는 스웨덴에서 대량의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기에, 묘지경계를 둘러싸는 4000미터가 넘는 돌담을 쌓는 공사에 실업자들이 대거 고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완공을 5년 앞둔 시점인 1936년, 레베렌츠는 스톡홀름 시와 갈등을 빚게 되며 프로젝트에서 해고되고, 이후 아스플룬드가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됩니다. 프로젝트는 1940년, 건축가가 55세가 되던 해에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해 10월, 군나르 아스플룬드가 사망합니다. 자신이 설계한 화장장에서 거행된 최초의 장례식이 바로 아스플룬드 본인의 장례였다는 것은 매우 가혹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면 프로젝트에서 해고되었던 레베렌츠는 90세까지 살면서, 말뫼 동부 묘지(Malmö Eastern Cemetery)와 성 베드로 교회(St. Peter's Church) 등 스웨덴 곳곳에 많은 중요한 건축물을 설계하였습니다.
다음 글 '거대한 자연으로부터의 위안(2)'에서는 우드랜드 공원묘지 내의 건축물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