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선포라는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놀랐다. 21세기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군인이라는 신분으로 10년을 살았기에 이런 이야기에는 늘 귀가 열리고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비상계엄, 비상계엄, 비상계엄... 진짜 이런 단어가 내가 사는 시대에 나올 줄이야.
지금 비상계엄이라는 단어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육아휴직을 나온 내 고등학교 동기생이다. 아이는 이제 150일, 며칠 전에 아이가 혼자 몸을 뒤집었다고 신나서 내게 동영상까지 보내주던 녀석이었다. 그 녀석도 군대에서는 아이를 키우지 못할 거 같아서 밖으로 나온다고, 육아휴직을 쓰고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불려들어갈지도 모른다니. 거기에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계엄령에 따라 살아야하고.
정말 필요한 비상계엄인가? 나는 모르겠다. 정치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건 내 글을 어지럽히는 수사고 나, 너, 우리를 가르게 만드는 이야기니까. 나는 그저 내 이야기를 적고 싶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과 그 사람 주변의 이야기, 내가 사는 삶과 공유하고 싶은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
오늘 영화 위키드를 보고 조금 울었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십수 년 전에 들었던 defying gravity를 리메이크로 들을 수 있어서, 그들의 우정과 마지막 이별 장면, 그 1막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어린 시절 봤던 위키드가 떠올라서 눈물을 흘렸고 옆에 앉은 형이 볼 수 없도록 조금씩 닦으며 그 장대한 마지막을 함께했다. 그래서 이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다. 국내에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지만, 나는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이야기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과연 필요한 비상계엄인가. 나는 이 글을 마지막으로 정치적인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정치적 수사는 피하고 싶고 내가 봐왔던 현실, 열악한 근무지와 노동자들의 삶, 그리고 새로운 청년의 삶을 계속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비상계엄, 이 단어는 너무도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단어다. 다른 이들의 삶을 흔들어놓는 단어다. 듣기만해도 괴로운 단어다.
150일된 아기는 아버지 없이 밤낮을 잘 보낼 수 있을까. 형수님은 괜찮으실까. 군인이라면 이런 비상계엄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정치는 정치로 풀어내는 것이고, 그 정치의 기반에는 대화와 존중, 타협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이 모든 것들이 고려된 언사일까. 칼은 뽑혔고 이제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지고 있다. 우리는 내려오는 칼날을 막을 수 없다. 그저 바라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