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6. 악의-현대문학

강대한 빛에 쏘인 인간이 만든 그림자

by 카레맛곰돌이

화자, 뜻을 그대로 풀어내면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화자는 단순히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이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다. 이야기의 분위기를 이끌고 말하는 이,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에 대한 암시를 심는 것도 가능하다. 간단히 생각해 보면 어떤 인물을 만나기 전에 그에 대한 험담, 혹은 칭찬을 듣고 만나게 되면 그에 대해 첫 대면부터 선입견을 품게 되지 않는가? 화자는 암묵적으로 종이 위에서 말 한마디로 사람의 심리를 비틀 수 있는 자라는 의미다.


『악의』는 가가 교이치로, 혹은 그의 주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소설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 소설을 이끌어온 이와는 전혀 다른 인물의 입에서 시작되는 소설이다. 노노구치 오사무, 그는 화자로서 자신의 포지션을 공고히 다진다. 작가이자 친우인 히다카 구니히코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자신 또한 어린이책 작가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으며, 모든 일이 평범한 일상처럼 흘러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굉장히 놀랐지만 작가로서 르포를 남긴다는 사명감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식의 서술을 이어가고, 독자들은 이 서술에 대해 믿음을 가지며 따라간다. 흠잡을 게 없는 단단한 서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믿음은 점점 붕괴된다, 가가 교이치로의 서술을 통해서.


그의 이야기가 끝이 나면 가가 형사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넘어간다. 가가 형사의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금 노노구치 오사무의 서술로, 다시금 가가 형사의 이야기로 끊임없이 화자라는 권력을 이양하며 소설을 풀어나간다. 이야기가 시작된 지 50p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베스트셀러 작가 히다카 구니히코는 죽었고, 그보다 50p 더 지난 100p에서는 이미 범인이 노노구치 오사무인 것까지 밝혀졌고 그의 입을 통해 살인의 사유까지 밝혀졌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어째서 지속되어 남은 200p를 더 풀어내야 하는가? 여기에서 작가는 who, how, why 중 why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어째서 그는 히다카 구니히코를 죽여야만 했는가, 그의 입에서 나온 게 아닌 진짜 진실은 무엇인가.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악의』는 「가가 형사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가가 형사는 동 작가의 다른 시리즈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탐정 역, 유가와 미나부와는 반대급부의 인물상을 보인다. 유가와 미나부가 how, 그러니까 어떻게 인물을 죽였는가에 대해 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밝혀낸다면 가가 형사는 why, 왜 범인이 피해자를 죽였는가에 집중한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형사 특유의 날카로운 직감과 정석적인 탐문 수사, 그리고 가가 교이치로 특유의 집요함과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능력이 빛을 발한다.


이번 사건 또한 가가의 집요함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범인의 수기로 이야기가 알맞게 풀린 것처럼 보이기에 모든 인물이 수사를 끝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만이 실마리를 쫓으며 주위 인물들을 쫓아가기 시작했기에 숨겨진 본질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순수한, 그래서 추악하고 더러운 악의를.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인간의 순수한 악의, 어째서 그간 힘에 굴복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 마지막 순간에 이토록 악의적이고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에 대해 밝혀진다. 이 모든 이야기를 따라온 독자가 마지막 순간에 전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이야기에 우리가 사시나무처럼 떠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 주위에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을까, 무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우리의 삶과 거리가 있는 유명 작가와 무명작가다. 하지만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모든 이야기는 학교라는 작은 장소에서 시작된다. 학창 시절,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에 암암리 존재했던 학교폭력에 대한 이야기. 노노구치 오사무는 자신을 괴롭히고 부하 취급했던 이들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화살은 전혀 다른 방향, 자신을 긍정해 줬고 어려운 순간 언제나 함께해줬던 인물에게 향했다. 어째서 그는 은인에게 화살을 돌렸을까. 그에게는 물리적 폭력보다 그가 비추던 빛이 더욱더 고통스러웠던 게 아닐까. 그래서 강대한 빛 뒤에 짙은 그림자가 깔리는 것처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악의, 그의 삶 모든 것을 부정하는 악의를 펼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최근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양한 소설을 읽어 나가며 그의 세계를 따라 걷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가 그리는 인간의 고저폭에 나는 어떠한 답도 내리지 못한 채 입을 벌리며 따라갈 뿐이다.


2000자 남짓으로 썼던 악의 서평, 과거에 썼던 서평과 비교하면 단순히 재미있었다의 수준을 넘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세계관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게 발전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단지 2000자라는 틀에 맞추기 위해 많은 내용을 다루지 못한 건 아닌가, 때로는 쓸모없는 문장이 너무 많지는 않은지 가끔씩 경계하게 된다. 글자 수 제한이 없다면 이보다 많이 적었겠지만 그건 또 아니니까 못적은 문장들이 떠올라 아쉬운 서평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55. 6월 독서 리뷰/프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