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서점, 작은 별들의 전쟁
아, 빨리 일어나서 첫날 후기를 적어야 하는데. 숙소에 작은 욕탕이 있는 걸 보자마자 물을 채우고 몸을 던졌다. 나는 욕탕 있는 집에서 물세 걱정 없이 매일 욕탕을 쓰면 좋겠다고 말하는 욕탕주의자다. 고된 일상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다음 뜨끈한 물을 받은 욕탕에 몸을 던지면... 욕탕을 위한 헌사를 남기자면 끝없이 나열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정신도 욕탕 밖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내일도, 모레도 북페어의 이야기를 쓸 수 없을 느낌이어서.
8시 30분, 경기도에서 차를 끌고 군산으로 향했다. 출발 당시 3시간 후에 도착한다는 티맵의 예상은 한참이나 벗어났고 화성에서 행안도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에서 한 시간을 넘게 쓴 끝에 1시를 조금 넘어서 군산에 도착했다. 시민회관을 올해부터 다시 열었다고 하던데, 그래봤자 시민회관이 얼마나 크겠어. 그래도 100팀이나 인원을 받았는데 닭장처럼 몰아넣지는 않았겠지. 머릿속에서는 계속 인천 아트북페어가 재생되고 있었다. 과연 얼마나 크게 행사를 준비했을까. 서울 국제도서전에 나왔던 팀은 나왔을까. 인천 아트북페어에 나왔던 독립출판사들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나 전역한 후로 진짜 책과 관련한 추억이 늘고 있구나. 인천 아트북페어, 서울 국제도서전, 독서모임, 이제는 기억하게 된 일부 독립출판사들, 받았던 교육과 강연들, 그리고 아트북페어에서 사야만 했던 5도 금박 양장본 세계 고전... 솔직히 처음에는 출판사 취업이라는 꿈을 꾸면서도 다른 한쪽으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책과 멀어졌던 시간이 길었는데, 다시금 그 길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섣부르게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 먼 걸음이 내 대답의 일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은 품어본다. 아, 그보다 북페어 후기다. 이 이야기 처음에도 적은 거 같은데.
일단 행사 주최자, 그리고 부스 참가자가 아닌 일반 관객의 기준에서 이번 북페어는 굉장히 성공적인 북페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점심시간에도 이미 마켓은 만원이었고 식사시간을 지난 2시 이후에는 발 디딜 장소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 말고 순수히 꼽고 싶은 이번 북페어의 가장 큰 가치는 독립 서점들의 약진과 많은 인근 군산 시민분들이 스스럼없이 방문할 수 있는 북페어였다는 점, 이걸 강조하려고 한다. 1시에 도착하고 마켓을 둘러보다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밥집을 찾아 한참을 서성일 때 보이는 것은 군산 북페어 스티커를 붙인 가족 단위의 주민들이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삼삼오오 오는 가족들이야말로 수많은 관람객 중 가장 빛나는 사람들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거 지난번에 본 동화책 아니었어? 그 교회 앞에서 행사하던 동화책!"
"어, 맞아요~ xx교회 앞에서 행사했었는데, 그때도 보셨나봐요."
동화를 기억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와 뿌듯하게 바라보는 어머니, 이 모습만 놓고 봐도 이번 북페어는 충분히 가치가 있지 않았을까. 독자가 없다고 말하는 시대에 새로운 독자가 이 행사로 만들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 독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동화와 같은 책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인천 아트북페어에 나왔던 동화 출판사들이 군산 북페어에도 나왔다. 지난번에 유의 깊게 봤던 『채소 먹는 악어』라는 책을 냈었던 섬드레 출판사는 이번에도 보였고, 그 외에 다른 동화 출판사들도 아이들에게 많은 책을 선보였다. 그리고 동화는 아니지만 아이들의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한 동물 책들도 여럿 있었다. 아파트에서 탐조를 하는 이야기라던지, 고양이, 강아지와 같은 애완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라던지. 사실 애완동물에 대한 이야기, 특히 강아지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는 좋게 말하면 익숙한 주제고 나쁘게 말하면 누구나 떠올릴법한 주제다. 하지만 빌딩 탐조, 이 주제는 생각보다 재미있고 번뜩이는 주제였기에 굳이 이렇게 꼽으면서까지 칭찬하고 한편으로는 아쉬웠다고 말하고 싶다.
빌딩 탐조, 이런 게 가능한 지역이 얼마나 될까? 나는 군산, 서산, 거제도와 같은 일부 철새도래지를 제외하고는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통 빌딩 탐조라는 재미있는 키워드를 가져오는 지역 또한 철새도래지에 있는 독립서점, 혹은 부스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군산 최초의 새 관련 부스라는 키워드를 들고 나온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 소개글을 보고 꽤 많은 걸 기대했다. 서산에 살 당시에 철새도래지에 반년에 한 번씩은 방문하면서 새를 찾던 나였기에, 겨울이 될 때 바다에서 새를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차를 끌고 나갔던 나였기에. 이 지역의 새와 관련된 책이나 철새에 관련된 책이 있지 않을까? 기왕이면 탐조 에세이라던지, 사진집이라던지, 그런 것들이 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범용적인 책들이라고 해야 할까, 아파트 탐조라는 재미있는 키워드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철새들에 대한 이야기여서 지역만의 특색을 살리는 책이 없다는 사실에 김이 샜다. 사실 이런 기획은 굉장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기획이다 보니 현 시장 특성상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지역 대표 새 관련 부스라는 멋진 현판을 붙이려면 이 정도 기획은 해줘야 하지 않을까. 돈도 되지 않는 기획을 한 번 넌지시 던져본다.
조금 규모가 있는 독립서점과 출판사에 대해 말한다면 다들 유유와 워크룸프레스를 꼽지 않을까 싶다. 북페어와 같은 행사에 언제나 참가하는 단골들이자 과연 여기에 끼는 체급이 맞나? 이제는 그런 생각마저 드는 출판사들. 이번에도 어김없이 재미있는 책을 가져왔다. 유유는 특유의 가볍고 편안한 책들을, 워크룸은 특유의 독특하고 진중한 책들을. 하지만 워크룸 프레스의 바로 옆에 영화, 예술, 인문 교양 전문 출판사이자 독립서점인 더 북 소사이어티, 미디어버스 부스가 있어서 그랬을까, 이들 덕에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미디어버스의 책이 여전히 다가가기 어려웠다는 이야기와 같기도 하다. 『영화도둑일기』를 재미있게 읽고 서평을 남기기도 했지만 시네필 호소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내게 아직 미디어버스의 책은 넘을 수 없는 장벽과 같았고, 이번 책들도 내 수준보다 높은 책들이 나왔다. 아, 다가가고 싶은데 어렵구나. 오늘도 미디어버스의 인스타그램에 하트 하나만 남긴다.
지역의 대표 독립서점들은 이번 북페어의 꽃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독특한 부스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었던 조용한흥분색, 소통을 컨셉으로 잡은 심리서점 쓰담, 그리고 리루서점을 필두로 한 군산서점 모임 부스까지 군산의 대표 독립서점 부스는 물론이고 통영에 있는 남해의봄날, 전주의 물결서사, 대구의 더폴락과 같은 부스들도 모두 이번 군산북페어의 동네책방 컨셉을 빛내줬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런 지역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독립서점, 출판사들은 각자 지역만의 특색 있는 책을 가져오기에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고 말하겠다.
마켓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른 층으로 이야기를 옮겨보려고 한다. 1층에서는 토크, 2층에서는 마켓, 3층에서는 전시를 준비했는데 안타깝게도 군산에 갈 계획은 세웠으면서 토크 예약을 할 계획은 세우지 못했기에 오늘 토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도 내일도 토크를 보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만큼 러프한 일정이 아니기도 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3층 전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3층에서 준비한 전시는 독립출판의 역사에 대한 전시였다. 독립출판의 시작, 전개, 그리고 현재에 대한 이야기. 나는 사실 아트북페어에 관람객으로 가면서도, 국제도서전에 관람객으로 가면서도 독립출판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을 못하고 있었다. 일반 서점에서는 하기 힘든 기획, 그러니까 대중성이 조금 떨어지고 상업성도 조금 떨어지지만 핀포인트의 독자층을 노리는 기획을 주로 한다? 솔직히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그들을 폄하하는 건 아닐까, 누군가 내게 정의를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고. 하지만 전시를 보면서 깨달았다. 아, 독립출판은 어찌 보면 더 원초적인 것이고 진짜로 내 설명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00년대의 독립출판이란 그런 것이었다.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예술을 표출하기 위한 출판물,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드는 행동, 비단 출판사뿐 아니라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자기를 표출하는 표출구. 나는 전시된 책들 중 『헤드에이크』라는 저 독립출판물들이 재밌어서 한 장 찍어봤다. 09년도에 처음 출간했던 독립출판물인데 그 당시에도, 지금과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보면 사실 청년들의 고민은 전 세계, 전 시간축의 공통분모가 아닐까. 이런 식으로 매 회마다 전혀 다른 기획을 가져왔던 『헤드에이크』는 독립출판물 중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고, 이 시장의 붐을 일으키는데 일조했다. 내가 이 책을 찍어 온 이유는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억지로 포장하려고 했었던 독립출판이란 사실 『헤드에이크』처럼 그저 하고 싶은, 재미있는 책을 만든다는 원초적인 생각 아래에 만들어지는 물건들이라는 피할 수 없는 펙트를 보여주는 작품이기에. 그러면 원초적인 걸 만들면 멋지지 않은 건가? 아니, 『헤드에이크』도 충분히 멋진데? 굳이 포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는데 나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1일 차 후기를 남겼으니 오늘 구매한 책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남해의봄날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 『참 좋았더라』, 워크룸에서 나온 『아메토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나온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나는 이 세 권의 책을 샀다. 『참 좋았더라』의 경우 부스에서 한 책 소개를 듣고 사기로 결심했다. 이번에 가져온 컨셉은 이중섭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낸 거라고 했다. 낭만의 시대를 사는 예술가의 이야기와 예술 작품에 대한 이야기.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는 이런 주제를 띄는 소설이 좀처럼 없었다. 프랑스의 벨에포크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 고도화되면서 예술이 꽃피던 시절, 유럽에도 낭만의 시대가 있었는데 어째서 우리나라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너무 좋은 주제의 소설이 나왔기에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워크룸의 책은 재미있어 보이는 주제여서 골라봤다. 일본의 패션 문화가 어떻게 미국 대륙을 홀렸는가, 50년대부터 분석하며 올라간다는 이 이야기는 워크룸의 부스 담당자분들도 설명하기 난해해하는 줄거리로 보였지만 그 키워드 자체는 굉장히 흥미가 갔기에 고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전주국제영화제의 책, 시네필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책이라고 설명해주셔서 순간 들었다가 내려놓을 뻔했다...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저는 저 자신을 시네필이라고 칭할 만큼 열심히 영화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주제는 코로나 이후의 변화하는 영화 시장에 대한 62인의 이야기라는데, 다들 알고 있겠지만 코로나 이후로 정말 영화 시장이 급속도로 변했다. OTT시장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영화관은 수익성 악화로 표값이 오르면서 방문객 수가 더욱 줄게 되었고, AI의 급격한 발달과 함께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이라는 이름과 함께 투쟁이 있기도 했었고... 생각해보면 격변의 시대라고 칭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런 흐름을 잘 짚어주는 재미있는 책이 될까. 기대해본다.
이렇게 북페어의 후기를 가볍게 남겨보려고 한다. 1일 차 후기라고 적어놔서 2일 차 후기가 있을 거 같지만 2일 차 후기는 없을 예정이다. 오늘 북페어 이후에 호수공원과 테디베어박물관에 방문해 사진을 찍었으니 내일 아침에는 근대역사박물관 투어를 하고, 2시에 『참 좋았더라』의 저자 김탁환 작가님 사인회에 참석해 사인을 받고 나서 집으로 올라가지 않을까. 일단 계획은 그렇게 잡았다. 체력이 버티면 좋겠는데. 내일 올라가는 길에 도로가 꽉 막힐 걸 상상하니 벌써부터 숨이 막힌다. 내일의 나 힘내라.
북페어에서 나온 후에는 이 두 곳을 방문했다. 은파호수공원과 군산 테디베어 박물관이다. 은파호수공원은 다리 사진이 예쁘게 나온다고 해서 다녀오고, 테디베어 박물관은 순수히 곰돌이를 보고 싶어서 갔는데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은 확인도 필요하고 보정도 필요하니 아무래도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사진을 한 번에 정리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내일도 일정이 빡빡하다. 북페어 때문은 아니고 근대역사박물관 루트를 돌고, 사인회를 참석한 다음 올라가면 적어도 6시, 7시는 되어야 집에 도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운이 나쁘면 올라가는 길에 피곤해서 졸음쉼터서 한숨 자고 올라가서 9시, 10시가 될 수도. 뭐, 하루 더 묵는 일보다는 그게 낫기도 하고 뭐든 조심해서 올라가는 게 제일이니까 이번 여행도 무사히 마무리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제 9월 1일이기에 8월 독서 결산도, 그리고 지난 스터디 모임 후기 글도 정리해야 한다. 음, 역시 월말에는 쓸 글이 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