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독서모임-과 술-, 집들이-와 술-, 인천공항까지 드라이브, 장례식 운고 후 오픈한 베이커리에서 매출 올려주기-와 술-, 여의도 한강 수영장에서 수영까지. 2일부터 7일까지 내 일정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오늘 저녁 나가는 길목에 아버지가 한 마디 던지셨다.
"뭔 백수가 이렇게 바쁘게 다니냐. 아니, 백수니까 애들이 불러줘서 나가는 거지. 지금 아니면 못 나간다. 나가서 놀다 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마 지금 아니면 이렇게 못 놀 거야. 이렇게 막 나가며 노는 것도 20대 중반 이후로는 거의 처음인 거 같은데. 그러면서도 쓸 글이 쌓여 있어... 더 많은 서평을 써야 해... 이번에 읽은 책 서평도 써야 하는데... 같은 소리나 늘어놓고 있으니. 사실 이렇게 노는 나도 나고, 전시전에서 광원의 배치가 어떻고, 작품 간의 유기성이 어떻고, 강연의 디테일이 어떻고 떠드는 것도 나다. 글 욕심을 부리면서 대충 휘갈겨 쓴 글에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도 사람도 나고, 그러면서 오늘 저녁 검도 수업을 기대하며 싱글벙글하는 사람도 나다.
오늘은 2일부터 7일까지의 이야기를 하루씩 정리해보려고 한다. 최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에게 넌지시 던지는 질문이 있다.
이런 캐릭터 밖에서 만나본 적 없어요?
이 질문을 받을 때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난감한 표정. 오늘도 이 질문을 넌지시, 지난 일상, 지지난 일상까지 읽고 이번 일상까지 읽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물어보겠다.
혹시 밖에서 이런 캐릭터의 사람 만나본 적 없어요?
1. 8월 2일 저녁 8시
불금기념 부천의 한 이자카야에서 중학교 동창들이 모였다. 안양에 있는 괜찮은 이자카야가 있다는 이야기에서 안양에 아는 형님이 연 빵집이 있는데, 아 우리 집 근처에도 괜찮은 이자카야가 있는데, 그러면 거기서 모일까?라는 의식의 흐름대로 잡힌 약속으로 모인 것이다. 일단 먼저 총평을 하자면 이 장소를 추천해 준 여사친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드릴 만큼 괜찮았다. 물론 가격이 괜찮지는 않았지만.
셋이서 하이볼을 8잔 정도 마시면서 나베에, 꼬치에, 나는 먹지 않는 오이 초절임이라던지, 별의별 음식들을 시키면서 1차를 성대하게 보냈다. 뭐, 이렇게 시킨 이유는 아마 자리가 1차, 혹은 2차 정도에서 마무리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시켜서가 아니었을까. 성대한 건 좋지만 그만큼 지갑이 얇아지잖아. 직장이 없는 내게는 치명적이라고. 아이러니하게도 나보다 직장인들이 더 치명적이라는 표정을 짓고는 있었지만.
30살 직전인 우리들은 모여서 그렇고 그런, 그냥저냥한,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다. 예컨대 회사 일이라던지, 애완동물이라던지, 사랑, 연애, 감정과 같은 무형적이고 몽환적이지만 손에 잡힐듯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라던지. 그리고 나는 그 주제들 사이에서 언제나 광대처럼 춤사위를 선보인다. 회사도, 애완동물도, 사랑도 하지 않는 내가 무대에서 가장 열심히 입을 놀리며 춤을 춘다니. 실로 광대라고 할 수밖에. 다행인 점은 내가 휘어잡은 무대를 싫어하는 관객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 이렇게 웃는 사람들이 있어야 이 감정을 먹으며 하루 더 살아갈 수 있지. 그래도 그냥저냥하지 않은 주제가 딱 하나 있었다, 타로. 후배들을 양성할 정도로 경력이 있는 타로 리더인 동창의 입에서 카드 해석에 대한 이야기들이 좀 길게 이어졌다. 참고로 나는 그에게 타로를 배웠고, 여사친 또한 그에게 타로를 배웠다. 요즘 공항에서 타로를 봐주다가 이목을 너무 끌어 곤란하다는 그는 언제쯤 그 타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벗어날 생각이 있긴 한 걸까. 요리사로 더 살기 싫으면 그냥 타로 점이나 보며 살아도 될 거 같은데 말이지.
술기운이 올라오고 거리를 거닐다 홀린 듯 들어간 텍사스 홀덤 펍. 뭐,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동석해서 게임을 하다 보니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어 아쉬웠지만 재미는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런 트럼프로 즐기는 진지한 게임을 좋아한다. 훌라, 포커, 블랙잭. 트럼프 탑 쌓기보다 더 많이 했던 카드 게임들과 텍사스 홀덤 또한 동류였고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1등을 한 건 아니었지만.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하던가. 우리 일행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사람은 여사친님이셨다. 자기는 아직도 룰을 잘 모르겠고, 족보 읽는 방법도 헷갈려서 딜러가 읽어주는 대로 대충 흐름따라 간다는데. 진짜 이 정도는 되어야 행운의 여신이 초심자의 행운을 내려주시는구나. 홀덤 펍에 들어오기 전 비비탄 소총 사격에서 1등을 하고 이번에도 일행 중 1등이라는 사실에 싱글벙글 웃는 그녀. 나도 덩달아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홀덤 펍에서 나온 이후 울려 퍼진 구호, 렛츠 고! 그 후에도 3차, 4차가 계속 이어졌다. 증류주를 시켰다가 맛이 없어서 으엑. 다른 술은 맛있을까? 한 병 더 시켰다가 맛없어서 또 으엑. 결국 토닉워터에 섞으며 한 잔 두 잔. 무슨 흐름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쯤부터 여사친을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거 같다. 저 놈이 오빠 소리에 미친놈인데 결국 살면서 오빠 소리 한 번을 못 듣고 살았다. 뭐 그런 이야기는 나왔는데, 그래서 내가 어째서 누나라고 불렀더라. 차라리 자기를 누나라 부르라 해서 불렀던가. 사실 아무래도 좋은, 취기 어린 책상 위의 농이니까. 그 후에 꽃받침부터 시작해서 손가락으로 V 만들어서 보내기, 손가락 하트 만들어서 보내기 같은 짓도 했던 거 같은데. 이렇게 말하니까 글에서도 술 냄새가 나는 거 같다.
노래방, 볼링장을 거치며 결국 우리는 거리에서 아침 해를 맞이했다. 뭐, 노래방에서 18곡을 신청해 그녀와 내가 9곡씩 나눠 불렀다는 이야기, 설렁설렁 볼링을 하다 마지막에 불이 붙어 친구와 동점으로 마무리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 술 이야기의 끝은 집이 아니겠는가. 일단 여사친은 집에 바래다주자는 생각으로 그녀의 집까지 다 함께 걸어갔다. 이미 대낮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밤길을 혼자 보내는 건 예가 아니니까. 그녀를 바래다준 후에는 각자 오는 첫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앞으로 4시간 후 독서모임에 가야 했고, 나머지는 일이 없어서 그날은 쉰다고 했던가. 아, 생각해 보니 죽마고우 그 친구는 어머니와 레쿠자를 잡으러 가야 한다고 했었다. 음... 이렇게 말하니까 나만 손해 본 거 같은데. 뭐, 이야기를 마무리하자면 싹 사라진 숙취처럼 그날의 이야기들 또한 농으로 치부되어 사라졌다. 혼자 숙취 때문에 고생한 여사친님은 어렴풋하게 남은 기억을 농으로 치부하지 않고 나보고 귀찮은 인간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다시는 누나라 부르지 말라 하긴 했는데. 솔직히 그런 말을 들으니까 또 끼 부리면서 부르고 싶어 지잖아. 음, 나도 아직 어른이 덜 되었나?
2. 8월 3일 12시
사실 이 이야기는 별로 필요 없는 이야기다. 독서모임 후기는 이미 썼고, 그 뒤 맥주 한 잔 하면서 나눴다는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간략히 써놨으니까. 그래도 써놓지 않은 소리를 좀 늘어놓자면 날씨가 정말 좋았다. 더위랑은 별개로 하늘이 높았고, 푸른 하늘에 어울리는 하얀 구름이 몇 조각 걸려 있었다. 독서모임서 내 자리는 창 너머 하늘이 보이는 위치였고, 솔직한 말로 몇 번씩 이야기를 하다 하늘에 시선을 뺏겼다.
하늘은 수채화인가 유화인가. 내가 본 하늘은 어떤 물감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청금석을 갈아 만든 물감으로도 그날의 하늘은 표현할 수 없으리라.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관망하듯 바라본 하늘이 주는 청량감은 이로 말할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저 밖에 던져진 것이 아닌 에어컨 아래에 있었기에 이런 느긋하고 감상적인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거겠지만.
그러고 보면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꺼냈다. 바깥이 더워지는 건 모두가 에어컨을 틀어서 그렇다고. 그러니까 우리도 틀지 않으면 손해만 보는 거라고. 음, 이걸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당시에 박수를 친 건 기억이 나는데. 확실히 이 날씨에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못 버티니까 손해긴 하지... 오늘도 에어컨을 발명한 캐리어님의 묫자리를 향해 절을 하는 많은 사람들과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나를 떠올리며.
3. 8월 4일 12시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면 언제나 주위에 결혼한 인원이 몇 안되게 있다는 말을 꺼냈다. 오늘은 그 결혼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매번 포뮬러 1(이하 F1)을 볼 때마다 나에게 연락하는 귀찮은 맥라렌 팬, 고등학교 시절부터 얼굴은 괜찮은데 입만 열면 깬다는 평을 받던 남자, 결혼식 일주일 전 북한에서 쏜 미사일 때문에 하객 없이 결혼식을 맞이한 신랑, 그리고 F1 경기가 끝난 후에 갑자기 나 어제 아빠되었다? 라는 선언을 한 미친놈. 아니, F1이 중요해? 아빠가 되었으면 그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 거 아냐...
사실 녀석과는 조금 복잡한 사정이 여럿 얽혀있다. 내가 전역을 선언하고, 내 중사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한 명이 충주에서 서산으로 전속을 와야 했는데 이 갑작스러운 일처리에 저 친구가 엮이게 되었다. 결혼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은 새 신랑이 전속을 가야 한다니. -자의는 아니었지만- 내 공석으로 생긴 문제였기에 녀석은 소식을 듣자마자 내게 전화를 걸어 욕을 했고, 나도 당당하게 국방부에 민원이나 넣으라고 맞불을 붙였다. 생각해 보면 우린 29살 먹고 아직도 애처럼 말하고 있네.
어쨌든 아빠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찾아가야지. 그런 생각으로 전역을 앞둔 후배와 같이 그의 집에 찾아갔다. 기저귀를 많이 쓴다는 둥, 바운서라는 아가들이 놀 수 있는 장난감이 정말 좋다는 둥, 오늘 40일 만에 처음으로 애가 심심해서 울었다는 둥, 이제는 완전한 애아빠가 된 녀석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 솔직히 억지로 밀어 넣고 소화시키는 기분이라 좋아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아빠라는 자리가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아마 내가 이렇게 한가로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그는 뜬눈으로 아가 옆을 지키고 있겠지.
길게 자리하지는 않고 간단한 인사말들과 함께 보내드린 기저귀는 잘 받으셨냐는 이야기, 다음에도 찾아뵙겠다는 말을 끝으로 집을 나왔다. 솔직히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아가를 가만히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부드럽고 만지면 안 될 거 같은 고귀한, 한편으로는 행여 부서지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존재와 함께 한다니. 주위에 애가 있는 집이 없어서 그런 걸까. 살짝의 경외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나도 언젠가 가정을 꾸리면 이런 일들이 일상이 되고, 이 작은 존재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는 괴로움과 행복을 동시에 맛보며 살게 될까.
점심식사서 막걸리를 한 병 비웠고, 카페에서 담소를 좀 나누다 그를 보내줬다. 평소에 과묵하고 진중하다는 평을 받다가도 나랑 함께하기만 하면 입이 뚫린다던데, 내가 사람들의 물꼬를 트는 힘이 있는 건지. 그 말에 같이 동석한 후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애초에 애아빠를 보기 위해 함께한 친구도 내가 심레이싱의 길로 끌어온 녀석이라 할 말이 없긴 한데. 보면 내가 여러 사람들 이미지를 부수고, 이상한 취미 권하는 느낌이네... 다음에는 애가 더 크면 오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파했다. 다음에 봤을 때는 얼마나 자랐을까. 100일, 200일, 1년. 내가 이렇게 보내는 시간 동안에도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겠지. 내년에는 책 만드는 삼촌이라고 너에게 소개해주고 싶구나.
4. 8월 5일 1시
사실 이날은 오랜만에 일정이 없는 날이었다. 머리를 정리하고, 집에 들어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낼 그럴 예정이었는데... 인천에서 머리를 깎는다는 내 이야기에 중학교 동창이 자기도 곧 퇴근이니 인천공항까지 와서 차를 태워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서 안된다고 말한 다음 집에 돌아가면 되었는데, 무슨 기분이었는지 나도 흔쾌히 오케이를 외치고 그 길로 인천공항으로 달렸다.
인천공항까지 가는 길은 서울의 다른 길들에 비해 비교적 순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이 탁 트여있다.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 많은 이들은 산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인천공항 출국장으로 향하는 도로 위를 떠올린다. 전날 밤에 비가 와서 그런지 공항으로 가는 길의 하늘도, 돌아오는 길의 하늘도 꽤나 장관이었다. 푸른 하늘 위 돛단배, 바람에 따라 유유자적 흘러가는 구름과 그 아래를 달리는 우리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운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하늘 때문이다. 속도감, 스릴, 이런 것보다도 하늘, 달리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하늘과 땅을 보면서 갈 수 있으니까. 이런 예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자동차 운전의 가장 큰 메리트가 아닐까. 태워줘서 고맙다는 이야기와 함께 저녁이라도 먹고 가자는 친구의 말에 나도 오늘 하늘이 예뻐서 즐거웠다는 말로 화답했다. 친구는 저녁식사가 끝난 후에 옷을 갈아입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다른 중학교 동창의 외조부상이라고 했던가. 내일 일정이 있어 따로 찾아가기는 힘들 거 같다는 말과 함께 그를 보내줬다. 그리고 우리가 헤어진 지 4시간 후 11시, 그에게 다시금 전화가 왔다. 혹시 장례식장서 운구를 해줄 수 있겠냐고.
5. 8월 6일 새벽 4시
남들이 자고 있을 시간, 겨우 일어나 머리에 물을 대충 끼얹고 차에 올라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5일 밤 장례식장에 운구를 할 남자가 부족해 도와달라는 친구의 요청이 있었고, 이야기를 들은 죽마고우가 당장 내가 생각나 연락했다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정장부터 꺼내서 스타일러에 던져 넣고 내일 가야 할 길을 대충 스캔했다. 꼭두새벽부터 운전해서 장례식장에 갔다가 점심시간을 맞춰서 안양에 갈 수 있을까. 피곤해 죽을 거 같은데. 못 갈 수도 있겠다. 침대에 누울 때 다양한 생각이 들었지만 5시에는 핸들을 잡았고, 친구를 태워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강변북로, 내부순환로를 지나 용케도 초행길서 헤매지 않고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뭐, 사실 내가 고생이겠는가. 어제 일하고 밤에는 장례식장에 들렀다가 자정 넘어 집에 기어 들어가고 새벽 강아지 산책 후에 내 차 조수석에서 떠들며 가는 옆자리 친구가 고생이지.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고, 가서 적당한 농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친구 좋은 게 뭐냐,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라, -이젠 아니지만-군인은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이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 그녀는 이런 이야기가 가식적이다 말하고는 웃으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꼭 마지막에 덧붙여줬다.
7시, 운구를 무사히 끝내고 남은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빠르게 장례식장서 빠져나왔다. 여기까지만 도와줘도 충분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었고, 우리들도 남은 일정이 있었다. 친구는 오늘부터 시작해 2박 3일간 놀러 오는 여자친구를 맞이하러 가야 했고, 나는 12시에 안양서 또 지인들 얼굴을 봐야 했다. 아마 둘 다 죽을 만큼 힘든 일정의 연속이겠지만, 그래도 돌아가는 길만큼은 웃을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
6. 8월 6일 12시
이제는 오픈한 빵집에서 보드게임 패밀리의 간단한 모임을 가졌다. 간단한 모임이라 해봤자 보드게임을 하지는 않고 서로 이야기나 나누면서 농담 따먹기 하는 자리다. 이 빵 맛있다! 저 빵 맛있다! 같은 이야기부터 일 이야기, 그리고 키포지나 디지몬 카드게임 이야기까지. 이제는 평균나이 30대가 되는 모임이지만 그래도 디지몬 카드게임과 보드게임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다들 키덜트라고 해야 하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빵은 맛있었다. 지금 가게 오픈한 이래로 매일같이 빵이 완판 되고 있다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나가는 거 아닌가? 이 중에서 내 취향은 저 옆에 잘린 피스타치오가 뿌려진 초코 크로와상이었다. 고소한 피스타치오와 크로와상, 그리고 그 속에 있는 크림까지. 의외로 크림이 너무 달지 않아 고소함과 달콤함의 밸런스가 잘 어우러지는 빵이었다. 같이 간 형의 입에는 반으로 갈랐을 때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르는 바질, 토마토, 치즈가 뿌려진 빵과 베이컨이 취향이라는데. 아무래도 커피랑 가장 잘 어울리는 빵이어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놀란 점이 하나 있다면 이젠 가게를 인터넷에서 찾으면 가게 이름이 나온다. 그러니 나도 이렇게 당당하게 가게 위치를 찍어서 올릴 수 있다. 앞으로도 빵 생각이 날 때마다 가끔씩 갈 거지만 지난 빵 사진, 이번 빵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가게가 문을 닫을 때까지 있다가 다들 본격적으로 보드게임을 시작할 때쯤 먼저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한강 여의도 수영장에 놀러 가자는 이야기와 함께 짐을 들어주면 좋겠다는 여사친님의 부탁 때문이었다. 퇴근길에 더현대에서 수영복을 보고 집에 간다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조금 헤매다가 결국 대방역에서 만났고, 돌아가는 길에 저녁과 함께 맥주 한 잔만 곁들인 다음 폴짝폴짝 뛰면서 그녀의 집으로 갔다. 자기 물건 조금에 내일 수영장에 같이 갈 위에서 이야기 나온 여자친구분의 수영복과 수건 조금. 다 챙겼을 때는 조금의 무게가 아니었지만 나와 인연이 꽤 긴 사람이었고, 서울에서 좋은 추억 만들고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마음에 선뜻 짐을 챙겨 들었다.
7. 8월 7일 7시
수영장 앞에서 일행 4명이 모였다. 나, 여사친, 죽마고우, 여자친구분. 씻을 곳이 여의치 않다던데,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몰린다던데, 수영모가 필요하다던데, 가본 이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저런 말들만 분분하게 나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즐겁게 놀았다. 그녀가 전날 미리 챙긴 수영복 덕에 여자친구분도 편안하게 수영장에서 놀 수 있었고, 우리들도 조금 급하게 잡은 일정이었지만 좋은 추억 하나 만들어드릴 수 있었고.
수영장이 넓은 만큼 많은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튜브를 가져온 사람부터 주위 신경 쓰지 않고 물보라를 날리며 수영하는 사람까지, 솔직히 나야 물 좀 뒤집어써도 괜찮았지만 입술에 예쁜 틴트까지 바르고 오신 분은 그렇지 않은 지 구명조끼에 몸을 맡긴 채로 둥둥 뜬 채로 하늘만 올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음이 조금 바뀐 듯 앞으로 누워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지만. 구명조끼만 입고 있으면 물에 뜨는데 앞으로 누우면 무섭다고 말하고,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가려고 허우적거리고... 가만히 보는 입장서도 웃음이 나왔다.
29살과 장난끼는 아무래도 관계가 없나? 물에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와 나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에 물을 뿌렸고 그 과정에서 머리를 몇 번 물속에 처박기도 했다. 우리가 노는 방법을 더 일찍 알았다면 그전에도 이러고 놀았을 텐데. 문득 인천공항에서 드라이브를 할 때 그가 내게 넌지시 던졌던 말이 생각났다.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게임보다 밖에 돌아다니는 일을 더 많이 했을까? 음,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시절 가지고 있던 놀이에 대한 순수한 마음은 잊지 않은 모양이다. 아직도 이렇게 놀고 있으니.
이렇게 물을 뿌리며 시간을 보내다 여사친이 틴트가 다 씻겨 나갔는지 잠수 대결을 하자는 말을 먼저 꺼냈고(나나 우리가 물을 뿌리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놀 때는 모두가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구명조끼를 잡고 수영하는 척 수영장 이리저리를 돌아다니다 잠깐 쉬는 시간 휘슬에 맞춰 물 밖으로 나왔다. 그 이후에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노래를 불렀던 떡볶이, 닭강정, 닭꼬치를 먹으며 쉬고, 또 물에 들어가서 놀고. 그 와중에 구명조끼를 부표처럼 잡고는 나보고 끌어달라고 해서 또 물에서 끌어주면서 고생하고.
결국은 폐장시간에 맞춰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생긴 문제가 있다면 물에 젖은 수영복과 수건, 짐을 내가 다시 들어다가 그녀의 집에 가져다줘야 한다는 점 정도...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다는 생각에 한 좋은 일은 맞지만, 오후 3시부터 검도장에 가서 개인 연습을 하다가 온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고역이었다. 점심에 좀 무리해서 운동을 하다 오지 않았으면 괜찮았으려나. 그래도 검도장 방학이 끝나고 다시 열리는 날이었기에 검도하는 걸 기대하고 있었단 말이야... 혼자서 허리 치기만 100번 넘게 연습하지 말고 좀 쉬엄쉬엄 했어야 했는데. 투덜거리면서 여의나루역에서 친구, 여자친구분과 헤어졌고 그녀의 집으로 함께 돌아갔다.
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꾸벅꾸벅, 힘들다고 징얼거리면서 집으로 향했고 나는 그 뒤에서 진짜로 힘들게 따라갔다. 발레와 검도, 인스타와 칼럼, 직장, 게임, 뉴스, 웹툰 할 이야기가 이렇게 없던가. 하긴, 남들 모두 릴스나 숏츠 보고 있을 때 미술관의 재정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칼럼이나 읽고, 지하철에서 유튜브를 보고 있을 때 혼자 밀리에서 『금각사』나 읽고 있는 사람이니. 그녀는 내일도 여의도에 9시까지 출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일 9시에 일어나서 글 쓰는 게 목표인 사람이고. 요즘 다시금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오고 있다. 나도 일을 시작하면 이들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며 살 수 있을까. 매번 출근하는 친구들에게 부럽다는 투로 놀리고는 있지만 그 말에는 내 진심도 조금 담겨있다. 나도 출근하고 싶어.
날 반겨주는 그녀의 애완견을 한참 쓰다듬다가 물을 얻어 마시고, 잠깐 세수하고(그런 와중에 안경을 어디에 뒀는지 까먹는 불상사도 생기고), 다리 풀어준 다음 속을 편하게 해주는 꿀차 마시라고 몇 마디 던지고는 막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키고 이 길고 긴 이야기의 시작을 풀어나가고. 집에서 멍멍이를 키우지는 않지만 요즘 멍멍이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힐링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인천의 죽마고우네 집에도 1m는 되는 흑구가 있고, 애 키우느라 고생하는 고교 동창의 집에도 차분한 말티즈가 있고, 그녀의 집에도 많이 활발한 말티즈가 있고. 다음에 말티즈 쓰다듬으러 가도 되냐고 물어보면 된다고 하려나. 일이 너무 많았으니 힐링이 필요해.
서문부터 지금까지, 대충 일만 자가 넘었으니 원고지 50매 분량은 넘었는데 이 상황에서 다시금 질문해보려고 한다.
이런 캐릭터 밖에서 만나본 적 없어요?
내 서평을 읽어본 사람들은 가끔 끓어오르는 열정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차분한 사람이라고 상상한다. 내 강연 후기를 읽어본 사람들은 분석과 주안점 찾기에 매료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일상 글을 읽은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특이한 발상의 소유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밖에서 만나본 사람들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런 이야기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많은 사람이 모이면 정반대로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고뇌, 의리, 우정, 사랑, 고민, 행복... 아마 이번 일주일은 수많은 감정이 혼재된 가장 복잡한 일주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솔직히 이번 이야기는 정리하는 것만 해도 벅찼다. 어젯밤 1시부터 3시까지, 오늘 점심 12시부터 지금까지. 힘들어서 대충 써 내려간 분량만 해도 이 정도라니. 앞으로 2시간 후에는 저녁 검도를 가야 한다. 어제의 여파, 정확히는 지난 일 주의 여파로 지금 피곤해 죽겠는데 검도장에 가서 또 날아다닐 수 있을까? 당연히 날아다녀야지. 열정 빼면 시체인 게 나니까.
내일부터는 아마 서평을 정리하지 않을까 싶다. 7월 독서 리뷰/프리뷰도 작성하지 못했고, 써야 할 서평도 많이 쌓였다. 내일 컨디션이 더 좋다면 좋은 글을 쓸 텐데 오늘 밤만큼은 운동이 끝나고 푹 자야지... 그리고 주말에는 밀이를 좀 쓰다듬으러 가고 싶다고 정식으로 요청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