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경철학 연구자이자 저술가(저자/작가)인 우석영입니다. 차기작으로 <지속가능성 개념어 사전> (또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개념어 사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 책의 원고를 브런치에서 사전 연재 형식으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난리통이지만, 감염병은 전지구적 생태환경 위기,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라는 문제에 비하면 도리어 작은 문제입니다. 이번 연재글은 이러한 인식 하에, 위에 언급한 위기와 관련하여 정확하고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한 개념어들을(예시: 인류세. 생태대. 그린뉴딜. 커먼즈 등) 선정해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제공됩니다.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층은 초등 고학년~성인으로, 어린이 청소년 용 교육자료로 쓰이기를 기대합니다.
* 이 책은 1부. 생물, 생태계, 지구 2부. 지구를 지배하는 인간 3부. 기후, 에너지, 지구생태계 파괴 4부. 전환의 인식론과 법 5부. 전환의 경제 6부. 전환의 라이프스타일 7부. 전환 운동: 어제와 오늘. 총 7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각 표제어는 차차 공개하겠습니다.
지속가능성/지속가능한발전/지속가능한탈성장
구글(Google) 검색창에 ‘sustainability’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1억 7천만 건 이상의 페이지가 나올 만큼 ‘지속가능성’이라는 용어는 널리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아전인수식 사용이 빈번하기도 해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한 용어이기도 하다.
sustainability이나 sustainable이라는 단어가 영어권 도서에서 제목이나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6년 이후부터다. 1980년대에도 일부 학자들이 이 용어들을 사용했지만, 시민사회에서 시민들이 두루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초반이다. 특히 1992년 리우 환경 회의 이후 UN이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을 공식 사용하면서 ‘지속가능성’ 개념이 세계에 널리 확산되었다.
‘sustainable(지속가능한)’이라는 형용사는 ‘sustainability(지속가능성)’이라는 명사보다 이른 시점에 사용되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은 ‘지속가능한’이라는 단어가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표현을 쓴 경제학 사전을 통해 1965년부터 상용되기 시작했다고 쓰고 있다.
지속가능성을 뜻하는 독일어 'Nachhaltigkeit'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앞선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속가능성’ 개념의 원시적 형태가 이미 18세기 초반, 즉 산업혁명 이전 시기에 독일에서 제출되었다. 광산업 공무원이자 숲 전문가의 아들이었던 한스 칼 폰 칼로비츠(Hans Carl von Carlowitz)는 자신의 산림학 저서에서 지속가능한 수확을 보장하는 임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속가능한’(Nachhaltig)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후 ‘지속가능성’을 뜻하는 ‘Nachhaltigkeit’라는 단어가 주조된다.
물론 20세기 후반기 새롭게 등장해 전 세계에 확산된 지속가능성 개념은 임학의 단위를 훌쩍 넘어선다. 무엇보다도 이 개념은 20세기에 극단적인 모습을 드러낸 산업 문명에 대한 성찰의 소산이다. 그 성찰의 핵심은 한마디로, 지구생태환경과의 조화 속에서만 인류 자신의 생존과 번영이 지속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즉 ‘지속가능성’ 개념은 산업화 시대라 통칭할 만한 약 250년간 인류 집단이 초래한 지구생태환경 파괴라는 심중한 문제에 관한 인식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생태적’ 지속가능성이야말로 이 개념의 핵심 아이디어라 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지속가능성은 무엇보다도 기후변화에 대한 인류의 대응과 관련된 개념어이다. 온실가스(이산화탄소, 메탄, 아산화질소 등) 배출과 같은 인류의 기존 활동이 기후변화를 초래하며 지구환경 내의 인류의 삶과 번영의 지속을 위태롭게 하므로, 기존 활동에서 다른 활동으로(예컨대, 저탄소, 탈탄소 활동으로)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문명 전환의 요청이 ‘지속가능성’이라는 한 단어에 응축되어 있는 이유다. 지속가능성 개념은 지구생태환경이 모든 경제활동의 토대임에도 산업화 이후 인류의 경제활동이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지구생태환경을 과도하게 파괴했으며, 지구의 자원은 인류의 무한한 경제성장을 위해 무한히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인식의 귀결점이기도 하다. 이처럼 ‘지속가능성’이라는 용어는 지금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큰일 난다는 ‘경각심(警覺心)’과 관련이 깊으며, 이 용어의 심층부에는 새로운 사회 프로그램을 요구하는 변혁의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1989년, 스웨덴의 종양학자 칼 헨릭 로버트(Karl-Henrik Robert)와 그의 동료들은 지속가능한 사회에 필요한 ‘네 가지 체계적 조건들’을 규정한 바 있다. 이들의 생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라면
“자연은 (1) 지구의 지각에서 추출된 물질의 총량을 (채굴) (2) 사회에서 생산된 물질의 총량을 (덤핑) (3) 물리적 수단에 의한 상태 악화를 (파괴) 체계적으로 증대하는 활동에 동원되지 않는다. 또한 (4)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할 자신들의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손상시키는 상황에 동원되지 않는다.” (www.thenaturalstep.org)
표현이 어려워 쉽게 바꿔보면 이러하다. 자원의 채굴, 폐기물 덤핑, 생태계 파괴의 총량이 체계적으로 증대하는 데 자연이 동원되는 곳이라면, 지속가능한 사회는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할 자신들의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손상시키고 있는 곳이라면, 지속가능한 사회는 아니다.
1990년대 제출되어 아직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지속가능성’ 개념의 본뜻을 위축시키고 모호하게 했다. UN 차원에서 제기된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에 동의할 수 없었던 이들은 ‘지속가능성’ 개념의 핵심 아이디어인 생태친화적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요구에는 철저히 등을 돌린 채, ‘지속가능성’을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으로 환원했다. 이른바 ‘프로메테우스주의(Prometheanism)’에 선 이들의 입장은 명쾌하다. 설혹 기후변화나 심각한 수준의 지구생태계 파괴가 현실일지라도 기술과 시장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불과하며, 관건은 새로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 경제성장을 지속할 것인가라는 문제라는 것. 요컨대, 이들은 ‘지속가능성’ 개념에 담긴 본질적 인식을 거부하며, 세계의 ‘생태적’ 지속가능성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자체의 지속가능성, 성장가능성에만 관심을 둔다.
물론 이것은 심각한 수준의 사상의 뒤틀림, 즉 왜곡(歪曲)이다. 물리학자 앨버트 바르텟(Albert A. Bartett)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어구는 모순어법이다.
이런 사상의 왜곡에 맞서 ‘지속가능성’ 개념을 수호하려는 어떤 이들은 21세기의 벽두에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의 폐기를 요청했다. 2001년, 브루노 클레멘틴, 빈센트 아이네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 대신 ‘지속가능한 탈성장(Sustainable Degrowth)’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탈성장(데크로상스) 운동을 촉발했다. 탈성장 운동은 2000년대 초반 프랑스 리옹에서 활발히 전개되어 하나의 운동으로 자리 잡았고, 점차 유럽으로 번져나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