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을 찾아서
천안 태학산의 깊은 품속, 나란히 자리 잡은 태학사와 법왕사는 마치 오랜 세월 서로를 의지해온 벗 같습니다. 두 절집이 마주 보고 서 있는 평온한 길을 걷다 보면, 일상의 소음은 어느새 잦아들고 오직 산새 소리와 바람의 숨결만이 곁을 채웁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시공간을 넘어선 경건한 만남을 기록해 보려 합니다.
왼쪽의 태학사를 조용히 돌아 절집 뒷길로 향합니다.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니 예상치 못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야트막한 공터에 자리한 대나무 숲. 바람이 불어와 대나무 잎들이 거칠게 몸을 섞는데도, 이상하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대나무의 움직임은 청각이 아닌 시각적인 '파동'이 되어 가슴으로 밀려들었습니다. 이 기묘하고도 고요한 숲의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갔습니다. 세상의 번잡함을 씻어내는 정화의 계단입니다.
[흑백으로 담아낸 천안 삼태리 마애여래입상의 웅장한 모습. 바위의 거친 질감과 대비되는 부처님의 온화하면서도 강건한 인상이 돋보인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압도적인 위엄과 마주했습니다. 거대한 바위 몸체에 새겨진 천안 삼태리 마애여래입상입니다. 강건한 돌부처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봅니다. 그 앞에 서니 바위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한 착각과 함께, 맑았던 하늘마저 찰나의 순간 어두워지는 신비로운 경험을 합니다.
그 정적의 틈을 타, 어디선가 날카롭고 경쾌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환청이라기보다 시공간의 문이 열리며 들려오는 역사의 목소리였습니다.
"챙-, 챙-"
고려시대의 도공들이 바위 속에서 부처님을 불러내기 위해 정을 치는 소리. 그 소리는 때로 은은한 풍경소리 같기도, 장엄한 범종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흩날리는 돌먼지 사이로 승려들의 낮은 염불 소리가 겹쳐집니다. 부처님의 영험함을 찬양하고 중생의 안녕을 빌던 그 시대의 열망이 천년의 시간을 건너 지금 이 자리에 울려 퍼집니다.
여러 사람의 지극한 노력과 간절한 기도 끝에 세상에 드러난 부처님. 그 영험함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탁한 기운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듭니다.
시간의 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그 경쾌하고도 경건한 울림은 산을 내려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운이 되어 귓전을 흔듭니다. 무엇인가 내 몸속에 흐르는 피조차 맑게 정화된 느낌. 태학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고 충만합니다.
천년의 미소는 여전히 그곳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말 없는 위로를 건네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