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을 찾아서
서산의 용현리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일상의 소음이 서서히 잦아들고 공기의 흐름마저 바뀌는 듯한 기묘한 경계에 다다릅니다. 우거진 숲과 텅 빈 터, 그 고요한 적막 속에 우뚝 솟은 거대한 두 개의 돌기둥이 시선을 압도합니다. 바로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입니다.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뻗은 이 두 기둥은 마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버티고 서 있습니다. 저는 오늘, 현실의 시계를 잠시 내려놓고 이 돌기둥이 만들어낸 '시간의 문'을 통해 천 년의 시간을 거스르는 여행을 시작하려 합니다.
[웅장하게 솟은 당간지주 사이로 멀리 오층석탑이 보이는 고즈넉하고 깊이 있는 풍경]
거대한 당간지주 사이, 그 보이지 않는 막을 조심스럽게 통과해 봅니다. 발을 내딛는 순간, 뺨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가 달라집니다. 텅 비어있던 초록빛 터 위로 순식간에 웅장한 기둥들이 솟아오르고 화려한 단청을 입은 전각들이 겹겹이 들어찹니다. 이곳은 더 이상 쓸쓸한 폐사지가 아닙니다. 1,000여 명의 승려들이 수행하며 내뿜는 뜨거운 열기와 짙은 향 냄새가 진동하는, 고려 시대 불교의 중심지 보원사의 한복판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오층석탑은 세월의 흔적을 말끔히 씻어내고, 갓 다듬은 화강암의 눈부신 자태를 뽐내며 서 있습니다. 사방에서는 승려들의 낮은 독경 소리와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어우러져 장엄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법인국사가 머물며 불법을 꽃피웠던 그 시절, 이곳은 단순한 절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간절한 염원이 모이는 거대한 우주였습니다. '화엄십찰'이라 불리던 대사찰의 위용이 피부에 생생하게 와닿습니다. 저는 바쁘게 오가는 옛사람들 틈에 섞여, 그들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돌 하나에도 혼을 담았던 장인들의 숨결을 느끼며 그 시대를 호흡합니다.
가슴 벅찬 시간 여행을 뒤로하고, 다시 당간지주 밖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경계를 넘어서자 훅 하고 끼쳐오는 현실의 건조한 공기가 화려했던 환영을 흩어놓습니다. 수많은 전각은 사라지고 다시 무성한 잡풀과 오래된 석탑만이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하지만 텅 빈 공간이 주는 느낌은 들어갈 때와 사뭇 다릅니다.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천 년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문을 닫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제 손목시계의 바늘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지만, 마음속의 시간은 천 년의 깊이를 담아 조금 더 묵직해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