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일락사, 돌담 너머 천 년의 시간으로 들어서는 문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일상의 소음이 유난히 버겁게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빽빽한 빌딩 숲과 끊임없이 울리는 알람 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충남 서산의 상왕산 자락으로 향합니다. 굽이진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울창한 숲이 만들어내는 서늘한 그늘이 이마의 땀을 식혀줍니다. 이곳은 신라 문무왕 시절부터 자리를 지켜온 고찰, 일락사로 향하는 길입니다. 숲이 깊어질수록 도시의 시간은 점점 느려지고, 마침내 사찰 입구에 다다랐을 때 저는 현실과 과거를 가르는 경계선 앞에 섰음을 직감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합니다. 투박하지만 견고하게 쌓아 올린 돌담과 그 사이로 난 작은 문. 이것은 단순한 사찰의 입구가 아니라, 663년이라는 까마득한 과거로 통하는 ‘시간의 문’이었습니다. 문지방을 넘기 전, 잠시 숨을 고릅니다. 이 선을 넘으면 2026년의 저는 잠시 사라지고, 천 년의 세월을 간직한 또 다른 세계와 마주하게 될 것만 같은 기분 좋은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돌담 너머로 드리운 나무 그림자, 그 고요함 속에 잠든 천 년의 시간을 엿보다]


돌담 사이로 난 문을 조심스럽게 넘어섭니다. 발을 내딛는 순간, 귓가를 맴돌던 바람 소리마저 결을 달리합니다. 눈부신 햇살이 기와지붕의 유려한 곡선을 타고 흘러내려 마당 깊숙이 드리운 나뭇가지 그림자와 섞입니다. 이곳의 공기는 바깥세상보다 훨씬 무겁고 진중하게 가라앉아 있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막이 사찰 전체를 감싸고 있어, 현대의 번잡함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결계 속에 들어온 듯합니다.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사진 속 왼쪽 편에 보이는 현판 아래로 낡은 나무 기둥이 묵묵히 지붕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화려한 단청 대신 나무 본연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 전각들은 이곳이 견뎌온 긴 시간을 대변합니다. 의상대사가 처음 이곳에 지팡이를 꽂았을 때도, 임진왜란의 병화가 휩쓸고 지나간 뒤 다시 기둥을 세울 때도, 이곳은 변함없이 ‘해가 뜨면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라는 이름의 뜻을 지켜왔을 것입니다.


대웅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그 안에 모셔진 철불의 온화한 미소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고려 시대의 장인들이 뜨거운 쇳물을 부어 만들었을 그 불상은 투박한 철의 질감 속에 가장 자비로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봅니다. 어디선가 은은한 풍경 소리와 함께 스님들의 낮은 독경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제 뺨을 스치는 이 바람은 천 년 전 신라의 하늘을 날았던 그 바람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쌓여 있는 기와 한 장 한 장에 깃든 옛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시공간을 넘어 저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앞마당을 천천히 거닐며, 저는 완전한 과거의 이방인이 되어 봅니다. 이곳에서는 스마트폰의 시계도, 다가올 내일의 걱정도 의미를 잃습니다. 오직 기와지붕 위로 떨어지는 빛과 그림자, 그리고 돌담을 쓰다듬는 바람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산신과 부처가 공존하는 이 신비로운 공간에서, 마음속 엉켜있던 실타래가 스르르 풀리는 듯한 평온함을 경험합니다. 역사는 책 속에 박제된 활자가 아니라, 이렇게 숨 쉬고 만져지는 공간 그 자체였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시간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담 문을 나설 채비를 합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가는 길 또한 현실로 복귀하는 의식과 같습니다. 문턱을 넘어 다시 숲길로 발을 내딛는 순간, 잠시 멈췄던 현대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하고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문을 닫고 나온 제 마음의 풍경은 들어갈 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일락사라는 시간의 문을 통해 길어 올린 천 년의 고요함이 가슴 한구석에 단단한 닻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비록 몸은 2026년의 현재를 걷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든 꺼내어 쉴 수 있는 낡고 아름다운 흑백의 풍경화 한 점을 품게 되었습니다. 서산 상왕산 자락, 그곳에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는 시간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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