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을 찾아서
도심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충청남도 공주, 굽이치는 금강 물줄기를 곁에 둔 공산성 입구에 섰을 때가 바로 그렇습니다. 익숙한 현실의 풍경을 뒤로하고 성곽을 따라 난 완만한 곡선의 산책로를 마주하는 순간, 마치 다른 차원으로 연결되는 시간의 문 앞에 선 듯한 묘한 떨림을 느낍니다. 이곳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1,5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특별한 기행문의 시작점입니다.
발걸음을 옮겨 성곽 안으로 들어섭니다. 잎을 모두 떨구어낸 겨울나무와 사계절 푸른 상록수가 어우러진 풍경은 계절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벽 위로 드리운 구름의 명암은 웅장하면서도 고요한 한 폭의 수묵화처럼 다가옵니다. 이곳의 공기는 바깥세상보다 조금 더 무겁고 진중하게 흐르는 것 같습니다. 금서루를 향해 뻗은 흙길을 밟다 보면, 저절로 숨을 고르게 되고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마저 옛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합니다.
[성곽의 곡선 너머, 멈춰버린 시간이 머무는 곳]
어느새 저는 2026년의 여행자가 아닌, 웅진성이라 불리던 그 시절의 백성으로 돌아갑니다. 눈을 감으면 성벽 너머로 다급했던 1,500년 전 백제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고, 잠시 후에는 조선 시대 인조 임금이 두 그루 나무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던 쌍수정의 적막함이 겹쳐집니다. 피난길에 오른 왕이 맛보았다던, 콩고물 묻힌 떡 '임절미'의 고소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착각마저 듭니다. 이곳은 찬란했던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이자, 훗날 조선의 왕이 불안을 달래던 피난처였습니다. 겹겹이 쌓인 역사의 시간 층위가 제 몸을 통과해 흐르는 기분을 느낍니다.
성곽을 따라 걷는 동안 현실의 시계바늘은 잠시 멈추었습니다. 돌 하나하나에 스민 64년 백제 도읍의 영광과 멸망의 쓸쓸함, 그리고 긴 세월을 버텨낸 강인함이 발끝을 타고 전해져 옵니다. 화려한 색채가 배제된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저는 오롯이 성곽의 거친 질감과 자연이 그려낸 선(Line)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저를 포근하게 감싸 안으며 위로를 건네는 순간입니다.
성곽길을 내려와 다시 도심의 풍경과 마주합니다. 시간의 문을 닫고 현실로 돌아오는 길, 등 뒤로 보이는 공산성은 여전히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문을 닫고 나왔을 때, 제 손목시계는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마음의 시간은 조금 더 깊고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과거로의 산책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잔잔한 여운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