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주산성 성곽 길, 안개 너머 고려의 시간을 마주하다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차가운 공기가 옷깃을 파고드는 계절, 경기도 안성의 비봉산 자락을 찾았습니다. 일상의 소음이 아득해지는 이곳 죽주산성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마치 과거로 향하는 시간 여행의 입구처럼 느껴집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마주한 산성은 자욱한 안개에 싸여 있었고, 그 흐릿한 풍경은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경계선처럼 보였습니다. 숨을 고르며 성곽의 입구에 섰을 때, 저는 눈앞에 놓인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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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성곽 위, 홀로 서 있는 나무가 묵묵히 세월을 견디고 있는 풍경]


문을 넘어서자 귓가를 때리던 바람 소리가 순간적으로 잦아들며 낯선 적막이 찾아왔습니다. 이곳의 공기는 바깥세상보다 무겁고, 시간의 흐름은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집니다. 발아래 놓인 거친 돌들은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맞물려 지난 천 년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안개 낀 성곽 위를 걷는 동안, 현대의 풍경은 지워지고 오직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홀로 던져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이곳은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거센 침략을 막아낸 치열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안개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마치 그날의 함성처럼 들려옵니다. 당시 송문주 장군은 귀신같은 지략으로 적을 물리쳐 ‘귀신 장군’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성벽을 쓰다듬어 봅니다. 차가운 돌의 감촉 끝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 흘렸던 이들의 뜨거운 숨결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지금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산세지만, 눈을 감으면 화살이 빗발치고 공성 무기가 부딪치는 긴박했던 고려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성곽의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르자, 잎을 떨군 채 홀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랜 세월 동안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진 이 성을 지키는 마지막 파수꾼 같습니다. 주위는 온통 안개와 여백뿐인 고립된 공간, 나무는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치열했던 전투의 기억을 뿌리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듯합니다. 화려함은 사라지고 오직 강인한 생명력만이 남아 있는 그 풍경 앞에서, 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압도적인 고독과 마주했습니다. 과거의 치열함은 이제 침묵이 되어 흐르고, 나무는 그 모든 시간을 관조하듯 서 있었습니다.


성곽을 따라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자욱했던 안개가 조금씩 걷히며 산 아래의 풍경이 드러납니다. 그제야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듯, 멀리서 들려오는 차 소리가 현실로의 복귀를 알립니다. 들어올 때 열었던 시간의 문을 다시 닫고 나옵니다. 성문을 나서는 길, 손목시계의 바늘은 크게 변함이 없었지만, 제 마음속의 시간은 천 년의 세월을 건너 조금 더 깊고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안성 죽주산성에서의 짧은 시간 여행은 잊고 지냈던 역사의 무게와 침묵의 가치를 일깨워준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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