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을 찾아서
일상의 부산한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순간, 살갗에 닿는 공기의 온도가 서늘하고 묵직하게 바뀌는 것을 느낍니다.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도착한 인천 옹진군의 영흥도에서 저는 단순한 유람이 아닌, 특별한 시간 여행을 기록하는 기행문을 써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바닷물이 썰물로 물러나며 넓게 길을 내어준 갯벌의 입구, 그 축축하고 부드러운 흙의 경계를 밟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치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이 스르르 열리며 저를 다른 차원으로 이끄는 듯했습니다.
[갯벌이 품은 수많은 시간의 결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고요한 풍경]
이곳 영흥도의 시계바늘은 수평선 너머 육지의 세상보다 한참이나 느리게 흐르는 듯합니다. 하늘을 수놓은 무거운 구름과 끝없이 펼쳐진 갯벌의 거친 질감이 깊고 차분한 조화를 이루며 광활한 자연의 생명력을 뿜어냅니다. 화면 좌측으로 조업을 나선 작은 배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저 멀리 아스라히 보이는 현대적인 송전탑과 발전소의 실루엣마저 옅은 해무에 가려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우측에 홀로 오롯이 솟아 있는 작은 섬 목섬은 오랜 세월 풍파를 견뎌낸 고독하고도 굳건한 파수꾼처럼 보입니다. 이 텅 빈 듯 가득 찬 여백의 풍경 속에서,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낡은 기록의 냄새가 물씬 피어오릅니다.
갯벌의 깊은 안쪽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바다 특유의 비릿하면서도 짭조름한 갯내음이 코끝을 맴돕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 주변의 공기가 한층 더 비장해지며 1950년 어느 늦은 밤의 영흥도로 완전히 타임슬립한 듯한 감각에 사로잡힙니다. 찰박이는 진흙을 밟으며 조수 간만의 차를 살피던 이들의 거친 숨소리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조국을 위해 기밀을 수집하던 해군 첩보부대원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귓가를 때리는 듯합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이 섬은 그 옛날 고려 멸망을 예견한 왕족이 신령스러운 기운에 기대어 목숨을 건진 도피처였을 뿐 아니라, 6·25 전쟁 당시 전세를 바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이끌어낸 치열하고도 고결한 역사의 전초기지였다고 묵묵히 말해줍니다. 육지와 고립된 섬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갯벌의 지형을 맨몸으로 파악하고, 방위대를 꾸려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던 지역 주민들의 간절함이 이 차가운 진흙 위에 여전히 뜨겁게 서려 있는 것만 같습니다.
과거의 애달픈 함성과 숨 막히는 긴장감이 다시 잔잔한 바닷바람으로 흩어질 무렵, 발길을 돌려 현실로 나가는 갯벌의 문턱을 넘어섰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목섬과 넓은 바다는 언제 험난한 역사를 품었냐는 듯 다시 고요하고 평온한 대자연의 모습으로 저를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을 닫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내 손목시계의 시간은 변함없이 일정한 속도로 현재를 지나치고 있었지만 마음의 시간은 그 깊고 시린 바다를 건너며 조금 더 깊어져 있었습니다. 역사의 굽이마다 누군가의 피난처이자 방패가 되어주었던 영흥도. 그곳은 잊히지 않을 숭고한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거대한 기억의 통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