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모항항, 멈춰진 시간의 문을 열다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번잡한 일상을 벗어나 훌쩍 떠나온 기행문의 첫 페이지를 이곳, 태안 모항항에서 넘겨봅니다. 끝없이 이어진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항구 어귀의 낡은 방파제 초입에 다가서는 순간, 마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시작하듯 귓가를 맴돌던 도시의 소음이 일순간 잦아들었습니다.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도심의 매연 대신 코끝에 닿는 짭조름하고 비릿한 바다 내음이 짙어지고, 살갗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가 한결 서늘하게 변했습니다. 눈앞에 놓인 허름한 선창이라는 물리적인 경계를 넘는 찰나, 저는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시간의 문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곳의 시계바늘은 바깥세상보다 한참이나 느리게 흐르는 듯했습니다. 시야에 들어온 풍경은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현대의 관광지가 아니었습니다.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내리쬐는 볕이 잔잔한 수면 위에 부서지고, 견고하게 쌓아 올린 테트라포드 끝에 자리한 원통형 등대의 실루엣이 거울처럼 맑은 물가에 반사되어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멀리 보이는 완만한 능선의 산과 방파제 안쪽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항구 마을의 옛집들은 마치 수십 년 전의 어느 날에 멈춰 있는 것만 같습니다.


[고요한 수면 위로 바다의 묵직한 기억과 평화가 스며드는 시간]


풍경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갈수록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오래된 기록의 냄새가 났습니다.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열어두니, 시간이 거꾸로 흐르며 환영처럼 과거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예로부터 해변에 '띠'라는 풀이 많아 '띠목'이라 불리던 시절, 이곳은 그저 고요하고 쓸쓸하지만 묵묵히 어민들의 삶을 품어주던 어머니 같은 바다였을 것입니다. 거친 파도와 싸우며 작은 나무배에 몸을 싣고 바다로 나아가던 어부들의 다부진 숨소리, 그물을 끌어 올리며 부르던 구성진 노랫가락, 그리고 등대 불빛 하나에 의지해 밤바다를 헤쳐 나갔을 낡은 목선들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맴돕니다. 저는 타임슬립을 한 여행자가 되어 그 시대 사람들의 애환과 생명력이 짙게 밴 포구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 평화로운 바다가 품고 있는 역사의 무게가 떠올랐습니다. 1991년 국가어항으로 지정된 이후 서해안 어업의 중심지이자 태안 해삼의 주요 산지로 번성해 온 이곳은, 2007년 유례없는 기름 유출 사고로 바다 전체가 검게 물들었던 뼈아픈 공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국에서 모여든 120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내민 헌신적인 손길이 기적처럼 이 바다를 다시 청정하게 되살려냈습니다. 참혹했던 생태계의 위기를 이겨낸 아픔과 치유의 역사가, 현재 제가 딛고 선 이 고요한 모항항의 물결 아래에 고스란히 묻어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런 뭉클함을 안겨줍니다.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뱃고동 소리에 흠칫 놀라 눈을 떠보니, 어느새 짙은 환상은 걷히고 다시금 현재의 공기가 뺨을 스칩니다. 시간의 문을 닫고 일상의 현실로 돌아오는 방파제 길목에서 가만히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시간은 변함없이 일정한 속도로 흐르고 있었지만, 찰나의 시간 여행을 마치고 온 제 마음의 시간은 이전보다 조금 더 깊어지고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복잡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깊은 사색과 향수를 안겨준 태안 모항항. 이곳은 언제든 일상이 버거울 때 가만히 열어보고 싶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시간의 문으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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